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짧은 잔치 긴 가난…‘구호대상’이 된 최영미

1990년대 시가 죽었다고 아우성이던 시절, 최영미(55)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세상에 나왔다. 1994년 3월이다. 무모함과 당돌함, 새로움이 주는 파격에 독자들이 열광했다. 여기에 명문대 출신, 학생운동 전력, 젊은 여성시인 등 문학 외적 이미지까지 겹치면서 ‘최영미 현상’이라 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최영미는 1980년 서울대 인문대에 입학해 운동권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졸업 후에는 <자본론> 번역에도 참여했다. 그는 한때 전두환 전 대통령 아들 재국씨가 운영하는 시공사에서 8개월 남짓 밥벌이를 했다. 그때 쓴 시로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했다.

1994년 9월16일자 경향신문은 ‘황금알’을 낳는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김진명, <영원한 제국> 이이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등이 독서시장을 주도했다. 그러나 1994년은 누가 뭐래도 최영미의 해였다. 첫 시집이 출간 6개월 만에 35만여 부가 팔려나갔다. 세간의 짐작대로 ‘수억원대 부자’는 아니었지만 최영미는 두둑한 인세를 받아 지하 사글셋방을 청산하고 아파트 전세로 보금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출판계에선 이때부터 책 제목에 20, 30, 40대 숫자를 붙이는 ‘나이 마케팅’ 붐이 일었다.



최영미의 시어들은 직설적이었다. 펄펄 끓던 1980년대를 통과한 청춘들의 1990년대 삶을 솔직하고 도발적으로 까발렸다. 대중은 환호했지만 평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롭고 과감한 시어”라는 찬사와 “아마추어의 자기고백 습작”이라는 냉소가 엇갈렸다. 심지어 “석사학위를 가진 매춘부의 언어”라는 조롱도 받았다. 최영미는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며 이를 견뎠다. 이후 시와 소설과 전공인 서양미술사를 넘나들며 4권의 시집과 두 권의 장편소설, 여러 편의 산문집을 펴냈다. 지난해엔 <서른, …> 개정판도 냈다. 그렇게 깜냥껏 글을 쓰고 틈틈이 강연과 강의를 하는 등 열심히 ‘부업’도 했다. 그랬던 최영미가 최근 페이스북에 자신이 근로장려금 대상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공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설마 했지만, 50만권 이상의 베스트셀러 작가도 언제든지 국가의 ‘구호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음이 드러났다.

최영미의 말마따나 “어쩌다 이 지경일까?”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된 문인은 대략 1만5000명 정도. 이 중에 고료와 인세만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1%도 안 된다고 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5 예술인 실태조사’를 보면 예술인들의 1년 평균 수입은 1255만원이었고, 문인들은 214만원이었다. 1개월도 아니고 1년간 글을 써서 번 돈이 214만원이라니…. 최영미는 이들보다 형편이 훨씬 나은 편인데도 생활이 안 될 정도여서 차라리 절필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시에는 “내 인생의 위험한 태풍은 지나갔다”(‘일기예보’)고 썼지만 ‘생활의 위험’마저 극복할 순 없었던 모양이다.

수많은 시인, 소설가들은 가난을 ‘따뜻한 국밥’이라 긍정하고 ‘소풍처럼’ 살다간다. 이들이 없다면, 팍팍하고 남루한 삶을 어디에서 위로받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계속’ 글을 쓸 수 있도록 응원하는 것뿐. 오늘은 책을 사러 가야겠다.



장정현 콘텐츠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