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현정은, ‘재계의 여장부’ 또는 ‘실패한 초보 경영인’

“정주영 대표의 집안에는 유별나게 남자가 많다. 정 대표는 8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 회장 아니면 사장이다. … 5남 몽헌씨는 현대전자 회장을 맡고 있다. … 다섯째 며느리 현정은씨는 현대상선 회장 현영원씨의 딸로 이화여대 출신이다. 현정은씨의 모친 김문희씨는 김용주 전남방직 창업자의 외동딸이다.”

경향신문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선후보 연구’ 시리즈를 게재했다. 그해 9월4일자 4면에는 당시 김영삼 민주자유당 총재, 김대중 민주당 대표 등과 함께 대선에 출마한 정주영 통일국민당 대표의 가족과 친·인척을 소개하는 기사(사진)가 실렸다. 신문에는 정주영 대표와 부인 변중석 여사가 여섯 며느리와 함께 찍은 사진도 게재됐다. 남편 정몽헌 회장과 결혼한 이후 집안 살림만 하던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61)의 얼굴과 이력이 시아버지의 대선 출마로 언론에 처음 공개된 것이다.




정주영 대표는 그해 대선에서 낙선한 뒤 현대건설 명예회장으로 복귀해 1998년 ‘통일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은 ‘소떼 방북’과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튼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켰다. 시아버지가 2001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전념했던 대북사업이 현 회장의 삶의 행로를 바꿔 놓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시아버지의 유업인 대북사업을 이어받은 정몽헌 회장이 2003년 8월 대북 불법송금 사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던 중 사망하면서 현 회장은 재벌가의 며느리에서 재벌그룹 총수가 됐다. 재계에선 기대보다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당시 현대그룹은 재계 서열 15위로 추락한 데다 계열사들이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었다.

2003년 시숙부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집중 매입하면서 빚어진 ‘시숙부의 난’과 2006년 시동생인 정몽준 전 의원이 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을 취득하며 인수·합병(M&A) 의도를 드러낸 ‘시동생의 난’은 현 회장을 시련 속으로 몰아넣었다. 두 차례에 걸친 정씨 일가의 ‘현대그룹 흔들기’에 맞서 경영권을 방어한 현 회장은 2009년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 ‘주목할 만한 세계 50대 여성 기업인’에 뽑히기도 했다. 그때부터 현 회장은 ‘재계의 여장부’ ‘현다르크’ ‘뚝심의 승부사’ 등으로 불렸다.

하지만 현 회장의 경영능력에 의문부호를 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부친과 시아버지가 애착을 갖고 키운 현대상선의 경영권은 채권단으로 넘어갔고, 주력 계열사였던 현대로지스틱스와 현대증권은 매각됐다. 이로써 해운(현대상선), 물류(현대로지스틱스), 금융(현대증권)으로 구성됐던 사업 포트폴리오는 현대엘리베이터 하나로 축소됐다. 게다가 현 회장은 지난해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증권 등 3개사에서 45억3200만원의 보수를 받아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자 현 회장에 대한 재계의 평가도 180도 달라져 “실패가 예견됐던 초보 경영인”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현 회장은 지난 3월 현대상선 이사회 의장에서 물러나며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그는 자신의 일대기를 다룬 책 <이기지 못할 도전은 없다>의 제목처럼 이기기 위한 도전에 나설 것인가, 아니면 실패한 경영인으로 남을 것인가. 현대그룹의 명운이 현 회장의 선택에 달려 있다.



박구재 기획·문화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