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개선장군·피고소인 ‘정명훈의 만세’

그가 두 손을 번쩍 들고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자 리틀엔젤스합창단 소녀들이 그를 에워싸고 꽃다발을 안겼다. 가족과 음악계 인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카퍼레이드 행렬이 지나는 연도는 인파로 물결쳤고 빌딩에서 색종이 비가 쏟아졌다. 서울시청 광장의 시민환영대회에선 젊은 예술가의 금의환향을 뜨겁게 축하했다. 1974, 21살 정명훈이 차이코프스키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위를 차지하고 개선했다(경향신문 713일자).

 

 

차이코프스키 음악제는 4년마다 열리는 세계적 권위의 국제 콩쿠르다. 벤 클라이번,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등 거장들을 배출한 피아노 부문이 특히 권위가 높다. 심사위원 23명 중 소련인이 14명이나 돼 공산권 참가자들에게 편파적인 대회로도 유명했는데 실제로 1위에서 5위까지 소련인이 독차지했다. 여기서 정명훈이 2표 차로 공동2위를 했으니 우승이나 다름없었다.

 

정명훈은 신동이었다. 5살 때 피아노 공부를 시작해 7살 때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협연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간 소년은 매네스 음대에서 라이젠버그를 사사하며 피아니스트로 성장했고 차이코프스키콩쿠르로 세계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러나 정명훈은 어려서부터 피아노보다 지휘에 흥미를 더 느꼈다. 1975년 줄리아드 음악원에 입학해 거장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제자가 되었다. 1978년 줄리니가 이끌던 LA필하모닉오케스트라 부지휘자에 취임함으로써 본격적인 지휘자 생활을 시작했다. 지휘자 정명훈은 이후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하며 동서를 넘나들었다. 그가 2006년 서울시립교향악단 지휘봉을 잡자 음악계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자랑스러워했다.

 

정명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쇳말이 있다. 가족, 음악, 요리다. 그는 세계 음악계에서 소문난 요리광이다. 2003년 요리 경험과 음식관 등을 담아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Dinner for 8>이라는 책도 냈다. 8은 자신과 아내, 세 명의 아들, 그리고 미래의 며느리들을 뜻한다. 당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한 대목만 봐도 정명훈의 가족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알 수 있다. “연주가 없으면 99.9% 집에 있고, 어딜 가나 가족과 간다. 음악과 가족 외엔 관심이 없다. 4살 연상인 아내를 19세에 만나 7년 연애 끝에 결혼, 30년이 되었는데 점점 더 사랑스럽고 좋아진다.”

 

2015,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하차하는 과정에 그의 사랑하는 가족이 등장했다. 아들과 며느리는 항공권 특혜 논란으로, 부인은 서울시향 사태연루 의혹으로. 정명훈은 1230일 마지막 공연을 마친 후 잘했어, 서울시향!”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총총히 떠났다. 그리고 6개월여 만에 진실이 밝혀지는 날이 왔다며 귀국해 피고소인이자 고소인 신분으로 검경의 조사를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제기된 문제나 의혹 등을 시인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이번에도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검찰 수사관과 기자들이 불쌍하다고 동문서답했다.

 

42년 전 두 팔을 번쩍 들고 개선했던 정명훈이 이번엔 검찰청사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이 느닷없는 몸짓은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의 자신감이었을까, 아니면 허위였을까.

 

장정현 콘텐츠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