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보고도 속는 까닭

김태희 | 실학21연구소 대표



연암 박지원이 중국에 갔을 때다. 패루를 지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뭔가를 에워싸고 떠들썩하다. 얼핏 보니 싸우다 죽은 송장이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늘에서 복숭아를 훔치다가 수위에게 맞아서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연암은 해괴한 소리라 여기고 얼른 자리를 떴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은 환술(幻術), 즉 마술이었다. 연암이 조선에 없는 구경거리를 놓칠 리 없었다. 중국 관리의 안내로 본격적인 관람을 했다. 마술사가 계란을 눈에 넣었다가 귀로 빼내고 콧구멍으로 넣었다가 뒤통수로 빼내는가 하면, 기둥을 등지고 두 팔을 뒤로 둘러서 묶어 놓았는데, 두 손이 묶인 채 감쪽같이 기둥에서 떨어져 나왔다.


매우 위험해 보이는 상황도 있었다. 칼을 하늘 높이 던지고 칼을 향해 입을 벌리니, 수직으로 떨어진 칼이 입속으로 내리꽂혔다. 칼을 더욱 삼켜 배 안에서 칼끝이 꿈틀거렸다. 구경꾼들은 기겁을 했다. 서서히 뽑아낸 칼끝에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또 종이가 개구리로 변하고, 양탄자 밑에서 새들이 나오는가 하면, 점점 더 깜짝 놀랄 마술들이 이어졌다. 마지막엔 뭘 시도하다 실패해서 잔뜩 긴장했던 구경꾼들을 한바탕 웃게 했다. 모든 마술이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구경꾼들이 새삼 깨닫도록 일부러 그런 것이다.


조선시대 학자 연암 박지원 (출처 : 경향DB)


연암은 자신이 본 스무 가지의 마술을 <열하일기>의 ‘환희기’에 기록해 전했다. 여기에 함께 관람한 중국 관리와의 대화를 덧붙였다. “눈을 뜨고도 제대로 분간할 수가 없군요. 눈이란 믿을 수 없는 겁니다. 마술사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이 아니라, 구경하던 사람이 스스로 현혹된 것이지요.” “세상에는 광명안(光明眼)과 진정견(眞定見)이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중국 관리는 역사 속의 여러 마술들을 열거했다. “조고는 사슴을 말이라 하여 반대파를 숙청하는 마술을 부렸고, 맹상군은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식객의 활약으로 탈출에 성공하는 마술을 부렸습니다.” “누구든 저마다 한 가지 마술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천하에 두려운 마술은 아주 간사한 자가 충성스러운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며, 덕 없는 자가 덕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에 연암이 천하의 간신배를 거명하며 응답했다. “웃음 속에 칼을 품고 있는 것이 입속에 칼을 삼키는 마술보다 혹독한 것이겠지요!” 


현실 세상에서는 마술무대보다도 더 심한 마술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스스로의 경험과 선입견에 갇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질 못한다. 연암은 ‘소완정기’에서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에 비추어 보라”고 했다. 그러자면 마음을 비워 맑게 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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