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1961년 12월5일 청계천 복개도로 개통

청계천만큼 수난을 겪은 하천도 드물다. 서울 종로구와 중구의 경계를 흐르는 길이 10.84㎞, 유역면적 59.83㎢인 청계천의 본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당시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은 평상시에는 오수(汚水)가 괴어 불결했고, 홍수가 나면 물난리를 일으켰다. 태종은 청계천 치수사업을 벌였고, 영조 때는 20만명을 동원해 바닥을 파내는 준설공사와 함께 유로(流路) 변경작업을 시행해 물의 흐름을 직선화했다.

청계천이 크게 변모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일제는 지명 정리작업을 하면서 ‘개천’이란 명칭을 ‘청계천(淸溪川)’으로 바꾸고, 대대적인 준설공사를 시행했다. 생활하수가 청계천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갔고, 이 과정에서 분뇨와 토사가 쌓여 하천 바닥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37년 무교동 일대를 복개(覆蓋·구조물로 하천을 덮어 씌우는 것)했다.

해방 후 수많은 피란민과 월남한 사람들이 청계천 주변으로 몰려들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청계천 전면 복개 결정을 내리고 1958년 6월부터 공사에 착수했다. 경향신문은 1961년 12월5일자 3면에 ‘청계천 도로 개통’ 기사를 실었다. 경향신문은 “청계천(종로2가~동대문)을 철근 콘크리트로 덮어 큰 도로로 만들었다”며 “공사비 23억3200만환을 들여 4년3개월 만에 준공된 이 도로는 총연장 2358m, 너비 16~54m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윤태일 서울시장은 이날 준공식에서 “청계천의 더러운 물이 가려져 시민 보건에 도움을 주고, 교통난을 완화하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1976년 자동차 전용도로인 청계고가도로를 개통한 데 이어 이듬해 청계천 전면 복개공사를 마무리지었다. 이로써 하천으로서 청계천은 서울시민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25년 넘게 콘크리트 밑에 숨어 있던 청계천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2002년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당시 이명박 후보가 공약으로 내세우면서다.

이 후보는 청계고가도로의 안전문제를 거론하며 청계천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청계천 복원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상인들의 반발과 청계천 복개 구조물 아래에서 발견된 문화유적의 처리를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2005년 10월 청계천 복원사업은 마무리됐다.

올해로 복원 10년을 맞은 청계천은 연평균 1800만명의 내·외국인이 찾고, 다양한 문화행사와 집회가 열리는 서울의 상징적인 공간이 됐다. 하지만 ‘빛’만큼이나 ‘그림자’도 짙다. 마른 하천이던 청계천에 물을 끌어다 쓰는 비용만 연간 18억원에 달해 ‘콘크리트 어항’이란 비판이 나온다. 폭우가 쏟아지면 행인이 고립되거나 물고기가 집단폐사하기 일쑤다. 청계천이 옛 모습을 되찾기는 했지만 생태계 복원이 이뤄지지 않아 ‘인공 하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박구재 기획·문화에디터 good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