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어제의 오늘

1971년 실미도사건 발생

엄민용 기자 
ㆍ북파 훈련 ‘인간병기’ 서울 향해 진격

1968년 1월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들은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한국군 복장으로 휴전선을 넘어 수도권까지 잠입했다. 하지만 세검정 고개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에 정체가 드러났고, 우리 군경과 교전을 벌였다. 당시 교전에서 28명이 사살되고 2명은 도주했으며, 1명은 생포됐다. 그때 생포된 사람이 현재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김신조씨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이 그해 4월1일 창설됐다. 대외적으로 요란스럽게 향토예비군이 창설되던 바로 그날 비밀스러운 부대 하나가 만들어졌다. 중앙정보부의 ‘특수공작 지시’에 근거해 창설된 ‘실미도 부대’다. ‘209파견대’ ‘684특공대’ ‘오소리공작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 이 부대의 창설 목적은 단 하나다. 북한에 잠입해 김일성을 죽이는 것.

‘실미도부대’는 북한이 내려보낸 무장 게릴라 수와 같은 31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철저히 인민군식 훈련을 받으며 단 3개월 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병기’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이후 3년여 동안 이들은 출동명령만을 기다려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1970년대 초 국제적 긴장완화 속에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정부로서는 이들의 존재 자체가 부담이 됐고, 결국 훈련병 전원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기간병에게 내렸다.

그러나 ‘인간병기’들을 상대하기엔 기간병들이 너무 나약했다. 훈련병과 기간병의 전투에서 되레 기간병 24명 가운데 18명이 희생되고, 6명만 살아남았다. 이것이 1971년 8월23일 오전 6시께의 일이다.

기간병들을 살해한 ‘실미도 부대’ 부대원 24명(나머지 7명은 훈련기간 중 사망)은 이날 낮 12시께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향했다. 이들은 육군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오후 2시께에는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까지 ‘진출’했다(사진). 하지만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대부분이 사망했다. 단 4명이 살아남았지만 이들 역시 이듬해 3월 사형됐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2003년 12월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를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부대원들이 사형수 등 범죄자로 구성된 영화 속 이야기와 달리 실제로는 민간인들로 구성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1968년 3월 충청북도 옥천군의 한 마을에서 실종된 7명의 청년이 ‘실미도 부대’ 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2004년 국방부에 의해 확인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