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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 결정

이윤주 기자 
 
ㆍ“세울, 꼬레아”… 나고야에 압승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 현지시간은 오후 3시45분, 한국에서는 오후 11시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서울 52, 나고야 27.” 서울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는 순간이었다. 나고야에 비해 열세로 평가받았던 서울이 예상을 뛰어넘는 압승을 거뒀다.
 
서울올림픽 유치의 꿈을 품은 것은 1979년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추대된 박종규씨였다. 1970년대 후반 한국 스포츠는 세계무대를 향해 막 도약을 시작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대한민국은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땄고,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일본과 중국을 위협하며 신흥 스포츠 강국으로 떠올랐다. 당시 사격연맹 회장을 지냈던 박종규씨는 1970년대 후반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가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치러지는 경험을 하면서 올림픽 개최를 구체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박 회장은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대한체육회 부회장에 외교관 출신을 기용해 스포츠 외교력을 강화했고, 실무연구반을 설치해 올림픽 유치 구상을 구체화했다. 1979년 3월 문교부에 정식으로 서울올림픽 유치건의안을 제출했고, 그 해 9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허가가 떨어졌다. 당시 정부로서도 한국의 경제 발전을 대외적으로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는 데다 공산권 국가와의 교류에 물꼬를 트는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올림픽 유치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1980년 12월, IOC는 한국의 수도 서울이 일본의 나고야와 함께 1988년 제24회 올림픽의 공식 유치 신청도시가 되었다고 발표했다.

서울과 나고야의 유치전이 본격 시작됐다. 국제 여론은 나고야 쪽의 우세를 점쳤다. 언론들은 “서울이 과연 IOC 위원 몇 명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느냐가 관심거리”라고 평가했다. 한국 실무단이 바덴바덴에 입성하기 직전에 점검한 결과 총회 투표자 82명 가운데 한국 지지는 26명, 호의적 고려 대상자도 6명에 불과했다. 그만큼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반드시 서울로 유치해야 한다”는 의지로 바덴바덴에 입성한 한국 유치대표단의 열성적인 활동이 표심을 돌렸다. 그리고 바덴바덴 현지의 서울 전시관이 큰 인기를 끌면서 분위기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서울올림픽의 유치와 성공적 개최 경험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존재감을 키웠고, 이후 한·일 월드컵, 평창 동계올림픽 등 굵직한 국제대회를 유치하는 데 초석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