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한국전쟁 60년

(3)-3 좌우 양측에 가족 희생 채정자씨 기구한 삶

ㆍ할아버지는 군 토벌대에, 부모님은 빨치산에, 남편은 삼풍백화점사고로, 며느리는 암으로
ㆍ할머니 손에 눈물밥 먹고 자랐는데 할머니 되어 눈물로 손자들 키우네

글 김진우·사진 김영민 기자

“누가 들어나 줘? 아무도 우리 말을 안 들어줬지. 억울하고 가슴이 찢어져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지.”



채정자(69)·정옥(66)·삼순(63)씨 자매에게 60년 전 사건과 이후의 삶은 누구에게도 호소할 길 없는 가슴속 응어리다.




채씨 자매의 할아버지는 1949년 전남 함평에서 빨치산 토벌작전을 하던 군인들에게 총살당했다. 좌익 활동을 했던 5촌 아저씨를 찾지 못하자 할아버지를 대신 죽인 것이다. 더 큰 비극은 2년 뒤 찾아왔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마을을 장악한 빨치산에게 살해됐고, 갓난아기를 업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던 어머니도 희생된 것이다. 정자씨는 “친척들은 우리만 봐도 소름이 끼치니까 ‘쉬쉬쉬’만 했다”며 “부모님 얘길 물어보면 ‘가시내들이 그런 얘기 한다’고 야단쳤다”고 말했다.



집안은 풍비박산났다. 남편과 아들·며느리를 잃은 할머니는 “정신이 나가” 일손을 놓았고, 딸 셋만 있는 집안에 “대를 잇기 위해서”라며 5촌 당숙이 들어앉으면서 재산은 금세 거덜났다. 입을 덜기 위해 정옥씨는 7살 때 광주에 수양녀로 보내졌고, 자매는 18살이 되자 모두 낯선 곳으로 시집을 갔다. 정옥씨는 “우리는 눈물로 밥을 먹고 살았다”며 눈물을 훔쳤다.





2009년 진실화해위에서 진상규명이 됐지만, 이들을 크게 위로해주지는 못했다. 정자씨는 “일전에 위령비 세우는 데를 갔다왔지만 이제 와서 아무 필요 없는 짓 같다”며 “부모가 없으니 배우지도 못하고 사람 구실도 못하고 살았는데 누가 그런 걸 보상해주겠느냐”고 말했다.



“지금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치 오늘 같다”는 정자씨는 감색 일바지(몸뻬) 두 벌을 내보였다. 한국전쟁 당시 집이 화재로 타버린 탓에 부모님 유품이라고는 어머니가 직접 짠 무명천이 유일했는데, 그 천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에 정자씨는 “60년 전 시작된 고생이 아직 안 끝난 모양”이라고 말했다. 서울로 올라와 고생 끝에 자그마한 집 한 채를 마련했지만 남편 이모씨는 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때 54시간 만에 극적으로 살아난 뒤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2006년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은 투자한 게 잘못되는 바람에 집을 나갔고, 둘째 며느리마저 2005년 암으로 사망했다. 정자씨는 지금 공공근로를 나가면서 고등학생 손자 2명을 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