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한국전쟁 60년

(4)-1 보훈 - 온전히 치유 받지 못한 상처

ㆍ‘국민의 의무’만 요구하고 ‘국가의 의무’는 소홀

김진우기자



‘보훈’의 사전적 의미는 ‘공(勳)을 갚는다(報)’는 뜻이다. 따라서 국가적 의미에서 보훈이란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이들에 대해 공을 갚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국가는 오랫동안 ‘직무 유기’를 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이들이나 그 가족들을 정당하게 대우하지 않았고 적절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



 

용산 전쟁기념관에 설치된 한국전쟁 조형물.





나라를 위해 산화해간 이들의 시신 수습부터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시신을 찾지 못해 위패로만 모셔져 있는 한국전쟁 전사자가 10만3000여명에 이른다. 정부는 한국전쟁 50주년인 2000년이 되어서야 전사자 유해 발굴을 시작해 지난해까지 4133구(국군 3380구)의 유해를 찾았을 뿐이다.



전사자의 유족에 대해서도 제대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1951년 2월28일 대통령령에 의해 제정된 군인사망급여금규정에 따르면 일등중사(하사) 이하의 사병에는 12만원의 사망급여금을 지급했는데 이는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이었다.



국군포로의 송환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집계한 국군 행방불명자는 1만9392명이다. 그러나 북한은 한국전쟁 직후 국군포로 수가 6만5000여명이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 이 중 포로 교환 당시 돌아온 국군포로는 8343명에 불과했다. 국군포로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94년 10월 고 조창호 중위가 탈북해 귀환하면서다. 현재까지 79명의 국군포로가 중국 등 제3국을 거쳐 탈북·귀환했다. 국방부는 현재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를 500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북은 2006년 제18차 장관급회담에서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포함해 ‘전쟁 시기와 그 이후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에 대한 문제해결에 합의한 바 있지만, 이행되지는 않았다. 같은 해 정부는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탈북 국군포로 및 가족의 송환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처음으로 규정했다.



전쟁의 외상과 내상에 시달리는 수많은 상이군인들에 대한 국가적 배려도 미흡했다. 한국전쟁 이후 ‘상이군인’의 기준이 무엇인지조차 뚜렷하지 않았다. 기준이 다르다보니 1950년대 주요 자료들에 나타난 상이군인 수는 적게는 11만여명부터 많게는 14만여명까지 큰 차이가 있다.




상이군인의 기준이 정리된 때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다. 박정희 정권은 61년 7월5일 ‘군사원호청설치법’을 제정하고 여러 부처와 단체에 흩어져 있던 원호업무를 총괄하는 군사원호청을 같은 해 8월 설치했다. 군사원호청은 이듬해 원호처로 승격됐으며, 84년 지금의 명칭인 국가보훈처로 개정됐다. 새로 설치된 군사원호청은 연금증서 일제갱신사업을 벌여 연금증서를 갱신하지 않은 자와 신체검사를 통해 자격미달인 자의 연금수급권을 박탈했다. 이를 계기로 연금수급권을 가진 상이자만을 상이군인으로 간주하게 됐다.



하지만 연금을 받는 뚜렷한 외상을 가진 자만이 상이군인이라는 규정과 이에 근거한 경제적·사회적 지원은 외상과 내상,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등 전쟁의 후유증에 고통받는 수십만의 상이자들 중 매우 적은 수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외상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사람은 물론이고 뚜렷한 외상이나 병상기록을 가지고 있는데도 상이등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연금수급권과 관련한 공무원의 부정부패도 만연했다고 한다. 상이군인들은 이러한 국가의 원호정책에 불평과 서운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단체를 만들어 힘을 써야지 뭔가 해준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이임하 성균관대 연구교수는 ‘상이군인들의 한국전쟁 기억’이라는 논문에서 “국가의 관리방식은 상이군인들의 몸과 마음속 상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쟁 경험과 어우러져 그들이 견고한 반공주의의 보루역할을 맡도록 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국가에 헌신한 이들에 대한 상징적인 예우도 소홀히 했다. 지금도 ‘보훈’이라고 하면 정부가 참전 군인들에게 생계비를 지원해주는 ‘원호’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처럼 ‘불쌍하니까 지원해준다’는 인식 속에서 보훈 대상자들에 대한 존경심은 자라나기 힘들다.




미국의 경우 국가유공자나 그 가족들에게 금전적인 보상과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자부심과 심리적 만족감, 그리고 명예를 심어준다. 예컨대 마을이나 학교 단위로 참전 사망자 명단을 현판에 새기고 있다. 프랑스도 ‘기억의 정치’의 일환으로 개선문에 희생용사를 기리는 횃불을 24시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이 원하는 최소한의 명예도 지켜주지 못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전쟁 참전 소년병들이다.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14~17세의 어린 나이로 입대해 군번을 받고 전쟁에 투입됐지만, 그 실체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전국 300여곳 현충시설 가운데 소년병 관련 시설은 단 한 곳도 없는 실정이다. 국방부가 소년·소녀병의 실체를 공식 인정하고 병적 정정 작업과 참전사 발간에 나선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국가보훈처의 위상 문제도 지적된다. 국가보훈처는 노무현 정부 시절 장관급으로 위상이 높아졌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 다시 차관급으로 낮아졌다. 유영옥 경기대 교수는 “이는 국가유공자의 위상을 격하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면서 “장관급의 타 부처에 비해 정책 형성 과정에서 소외되고 유관 기관과의 원활한 업무처리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보훈 관련 부처는 장관급이고, 대만은 부총리급이다.



사실 국내에 ‘보훈’이라는 개념이 성립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보훈이 본격적인 학술연구의 주제가 된 것도 한국보훈학회가 만들어진 2002년 들어서다. 유 교수는 “우리나라는 경제 수준에 비해 보훈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보훈 후진국”이라면서 “역사적으로 강한 국가일수록 강한 보훈정책이 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