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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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역사가의 양심 조선조 태종에게 귀찮은 존재가 있었다.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잘잘못을 기록해대는 사관이었다. 1401년 태종이 화를 터뜨리며 ‘사관 금족령’을 내렸다. “편전은 임금이 쉬는 곳이야. 사관은 들어오지 마!” 그러나 사관 민인생은 고개를 세우고 대꾸했다. “정사를 논하는 편전에 사관이 들어오지 못하면 어찌 기록한단 말입니까. 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上有皇天).” 3년 뒤인 1404년 태종 임금이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임금이 급히 일어나면서 측근에게 입단속을 명했다.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 기막힌 일이다. 사관이 ‘쓰지 말라’는 임금의 오프더레코드 명령까지 고스란히 에 기록했으니 말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최저가 임금을 살해했다. 그때 사관 3형제가 차례차례 나서 ..
[여적] 무가지보(無價之寶) 문화재 숭례문 250억원, 경복궁 경회루 100억원, 경복궁 근정전 33억원…. 국유재산 관리대장에 나와있는 문화재의 재산가치이다. 창덕궁 금원(비원)의 부용정은 8800만원, 경복궁의 향원정은 5600만원이다. 상식적인 기준에서는 터무니없는 가격이다. 국보 1호 숭례문 등의 가격도 그렇지만 1억원도 안되는 돈으로 궁궐 내 연못의 보물 정자를 구입할 수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는 문화재의 가치를 포함시키지 않고 일반 부동산의 평가기준으로 매긴 가격이다. 해외전시를 위한 보험금으로 추정한다면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 83호)의 가격이 최고가이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문화교류전에 출품할 때 반영된 보험금액이 5000만달러(당시 400억원)였다. 정식 경매로 거래된 문화재 가운데 최고가는 2012..
[정동칼럼]이쾌대, 유갑봉, 이여성과 광복 70주년 올여름 더위를 보기 드문 그림 전시회로 잊을 수 있었다.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이다. 미처 못 본 독자는 꼭 들러보시길 권한다. 한국 현대미술에 대해 나처럼 문외한이더라도 이쾌대(1913~1965)의 회고전은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에게서 보지 못한 세계를 만나게 된다. 우리 현대화가들의 탁월한 작품에 감동을 받으면서도 미진함이 없지 않았다. 우리 현대사의 격동 가운데 견디기 힘든 상처를 받기도 했던 이 예술가들이 왜 우리 역사의 진실, 즉 해방의 환희, 분단의 고뇌와 아픔을 더 크고 역동적인 구도 속에 담아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그런데 이쾌대에게는 해방 직후의 현실과 정면 대결하는 예술적 고투, 현역작가인 신학철의 한..
[이만열 특별기고]해방 70년, 감격과 반성 그리고 모색 초등학교 1학년 때 맞은 해방, 아직도 기억이 뚜렷하다. 어른들을 따라 간 신사(神社) 마당에는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시골 어르신들이 즐거움을 이기지 못한 채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홍명희의 표현처럼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편 높직한 곳에 자리한 신사가 불탔다. 화염에 싸인 신사를 보며 일제로부터의 자유가 현실화됨을 실감하는 듯했다. 심훈이 읊었던,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바로 ‘그날’을 어린 시절 경험했다. 나는 아직도 감격과 눈물 없이는 그날을 회상하지 못한다. 주일학교에 가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었듯이 우리도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신사 ..
[정동칼럼]광복 70년, 숫자놀이보다 더 중요한 것 어떤 인연인지 독일에 와 뉘른베르크의 전범재판소를 찾았다. 법학을 업으로 삼은 처지라 안 가볼 수는 없었지만, 마음으로는 그리 내키지 않았던 그곳. 한국인인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과거사 청산 작업의 원형이 실물로 목도되는 곳이기에 후진국민의 자의식이 사진 몇 장만 담은 채 서둘러 이 방문을 끝내게 만들었다. 뉘른베르크는 나치당이 횡행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치 전범들을 처단하는 국제군사재판이 열린 것은 그 점보다는 이 재판소 건물에 사무실과 법정이 많이 있다는 정말 하찮은 이유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이 재판소의 600호 법정은 1945년 11월부터 약 11개월간 괴링과 헤스, 리벤트로프 등 19명의 전범자들을 교수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한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600호 법정은 ..
[여적]대한제국 왕자의 꿈 1907년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특사 3인 중 ‘대한제국의 왕자’로 불린 사람이 있었다. 러시아 공사관 3등 서기관 이위종. 스물 두 살의 나이에 이상설·이준과 함께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던 헤이그에 도착한 그의 주요 임무는 통역이었다. 하지만 실제 역할은 그 이상이었다. 초대 러시아 공사를 지낸 아버지를 따라 10대 대부분을 미국, 프랑스, 러시아에서 생활한 그는 영어, 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 참석하지 못해 장외 언론활동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던 특사단은 그의 입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서양기자들과의 격의없는 인터뷰와 면담, 프랑스 군사학교 시절 몸에 밴 기품있는 태도. 현지언론들은 그를 의심없이 대한제국의 왕자이자 특사대표로 보도했다. 페테르부르크 ‘석간일보’는 심지어 “..
[여적]피 묻은 적삼 1933년 2월27일 오후 3시45분, 하얼빈 교외에서 거지 차림의 노파가 일제경찰에게 붙잡혔다. 속에 피 묻은 삼베 적삼을 입고 있었다. 권총과 비수, 폭탄도 나왔다. 독립투사 남자현 선생(1873~1933)이었다. 선생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만주국 전권대사 부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암살하기 위해 중국거지로 변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 밀정 이종현의 밀고로 수포로 돌아갔다. 61살이었다. 선생은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17일간이나 단식투쟁으로 버티다 순국했다. 밥을 내미는 일경에게 호통을 쳤다. “조선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 죽음은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부적처럼 입은 ‘피 적삼’은 의병투쟁에 참전했던 남편 김영주가 전사한 1896년 입었던 옷이다. 남편을 잃고..
[기고]광복 70주년에 돌아보는 몽양 여운형의 진실 7월17일은 몽양 여운형 선생 68주기다.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에 대비했던 그가 막상 해방 2년 만에 암살을 당한 것은 그 개인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었다. 혁명가치고 비운에 가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만 몽양의 경우 해방된 조국에서 큰 뜻을 펴보지 못한 채 정쟁의 희생물이 되고, 아직까지도 업적이 부각되기보다 왜곡과 폄훼가 심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몽양은 일급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초 중국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고 김규식 부인과 자신의 측근을 국내에 들여보내 3·1혁명의 ‘지하수맥’ 역할을 했다. 그리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한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몽양은 3·1혁명 후 적도 도쿄에서 일본 조야를 상대로 ‘조선 독립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