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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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홍길동전 원작자 논란 교양수신서 은 고려 말 추적(秋適)이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새로운 판본이 발견되고 연구가 진척되면서 최근 명나라 학자 범입본(范立本)이 원작자로 부상하고 있다. 의 저자는 양나라 주흥사(周興嗣)다. 그가 이 글을 짓고 머리가 하얘졌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위나라 종요가 을 썼으며 뒤에 주흥사가 운을 달아 유포했다는 학설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작자가 논란이 되는 고전은 더러 있다. 문헌에 작자가 명시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추적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구술자와 채록자가 섞여 있는 경우에는 원작자를 확정하기도 어렵다. ‘공무도하가’는 한 여인이 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은 남편(백수광부)을 위해 부른 노래이지만, 이를 채록한 이는 여옥이다. 백수광부의 처와 여옥은 모두 ‘공무도하가’의 ..
[김호기 칼럼]임시의정원 100주년을 기념하며 4월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조직이 ‘임시의정원’이었다. 임시의정원은 1919년 4월10일 중국 상하이에서 출범했다. 의장에는 이동녕이, 부의장에는 손정도가 선출됐다. 임시의정원은 다음날인 11일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발표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란 임시헌장 제1조는 널리 알려진 구절이다. 임시헌장 제2조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이를 통치함”으로 돼 있다. 이 규정은 임시의정원이 오늘날 국회가 맡은 역할인 입법 기능과 행정부의 견제 및 균형 기능을 갖고 있음을 알려준다. 임시헌장 제10조는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년 내에 국회..
[여적]임정 마지막 청사 경교장 1945년 11월23일, 백범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14명과 함께 김포 비행장으로 환국했다. 공항에서 동포들의 환영을 받은 백범은 곧장 죽첨장으로 향했다. 죽첨장은 금광업자 최창학이 1938년 지은 저택으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최창학은 골수 친일파였다. 일본의 전쟁 승리를 기원하며 비행기를 헌납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해방이 되자 백범에게 저택을 제공하며 애국자 행세를 했다. 미 군정이 왜색 지우기에 나서면서 죽첨장은 경교장으로 바뀌었다. 인근에 있었던 경구교(京口橋·서울 들머리 다리)에서 이름을 땄다. 응접실과 당구실, 전용 이발실까지 갖춘 대저택인 경교장은 백범 가족이 살기에는 너무 크고 화려했다. 백범은 집이 없어 한미호텔에서 묵고 있던 임정 요..
[경향의 눈]3·1운동 100주년, 첫발도 못 뗀 안중근 유해 찾기 지난주 중국의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다시 문을 열었다. 기념관은 2014년 1월 하얼빈역에 개관했다. 3년 뒤 역 확장을 위해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으로 이전했는데, 2년 만에 원위치로 돌아온 것이다. 하얼빈의 안 의사 기념관이 제자리를 찾으면서 안 의사 유해발굴에 대한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중국 정부의 우호적 태도가 유해발굴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유해발굴은 녹록지 않다. 기나긴 유해찾기의 역사가 말해준다. 안 의사 유해찾기에 처음 나선 이는 백범 김구였다. 백범은 1945년 환국 직후 해외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해봉환을 추진했다. 이듬해 5월 일본에서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를 들여와 효창원에 안장했다. 그러나 백범이 가장 모시고 싶은 애국지사는 안중근 의사였다. 그에게 안..
[여적]연해주 독립운동 대부 최재형 2004년 5월, 가수 서태지는 러시아 이주 140년기념사업회와 함께 연해주 핫산에 ‘지신허 마을 기념비’를 세웠다. 지신허는 1863년 착취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가 극동 러시아에 처음으로 한인촌을 세웠던 곳이다. 발해의 고토 만주 연해주에서 를 착상한 서태지는 비를 통해 1000년 전 발해와 100년 전 노령(露領)의 한인들을 기념하고자 했다. 1869년 9월, 함경도 경원에 살던 최재형 가족이 지신허에 합류했다. 노비 출신인 아버지와 함께 국경을 넘은 최재형은 9살 소년이었다. 고향을 떠났지만, 가정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두 해 뒤 가출한 최재형은 상선을 운영하던 러시아인 부부에게 입양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최재형은 선원생활, 무역업, 통역 등을 거쳐 ..
[여적]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안중근이 관동도독부 법원과 감옥이 있는 뤼순으로 압송된 것은 1909년 11월3일이었다. 하얼빈 의거 1주일 만이었다. 이후 안중근은 이듬해 3월26일 순국하기까지 143일간 뤼순감옥에 있었다. 일제는 안중근을 특별대우했다. 일반 형사범이 아닌 국사범처럼 대했다. 안중근은 떳떳하게 의거 사실을 인정했다. 일본 관헌은 당당한 안중근의 인격에 감화됐다. 필기구를 제공하며 자서전을 쓰도록 권했다. 안중근 자서전 는 옥중에서 탈고됐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도 저술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어떻게 독립운동에 투신했는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는지를 밝히고 싶었다. 옥중 투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저술이 끝나기도 전에 법원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고등법원장을 면회해 항..
[여적]황금인간 1921년 9월, 경주시 노서리의 한 민가에서 공사 중 구슬이 발견됐다. 조선총독부는 인접한 ‘노서리 제128호분 발굴에 들어갔다. 결과는 놀라웠다. 금빛 찬란한 금관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금관총’ 발굴이다. 일제는 1924년과 1926년에도 각각 ‘금령총 금관’ ‘서봉총 금관’을 발굴했다. 금관은 1970년대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도 나왔다. 지금까지 확인된 신라금관은 발굴 유물 5점과 도굴품으로 압수된 ‘교동 금관’ 등 모두 6점이다. 신라의 황금유물은 금관 말고도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 허리띠, 그릇, 신발 등 다양하다. 일본이 신라를 ‘눈부신 황금의 나라’()라고 불렀던 사정을 이해할 만하다. 신라는 어떻게 다양한 황금 유물을 제작해 사용했을까. 금이 많이 채굴된 게 원인일 수 있다...
[여적]임중도원(任重道遠) 동양고전 는 공자가 제자들과 토론(論)하고 대화(語)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영어 번역본의 제목 ‘The Analects(어록)’나 ‘Confucius analects(공자 어록)’가 ‘논어’의 뜻에 부합한다. 에는 ‘자왈’(선생님이 말씀하셨다)로 시작하는 공자의 어록만 있는 게 아니다. 제자들의 말도 실려 있는데, 특별히 증삼·유약·민자건은 각각 증자·유자·민자로 기록했다. 이름을 쓰지 않고 선생님을 뜻하는 접미사 ‘자(子)’를 붙인 것은 존경의 표현이다. 이 때문에 문헌학자들은 의 편찬자로 증삼·유약·민자건의 제자들을 지목한다. 공자의 손자뻘 제자들이 엮었다는 얘기이다. 증자는 아버지 증점의 권유로 공자의 문하에 들었다. 이후 스승의 학문을 공자의 손자 자사에게 전수해 유학의 도통을 잇게 했다. 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