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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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연 칼럼]김원봉과 황장엽에 대한 불공평한 시선 한국 보수의 특징은 대북강경정책이다. 하지만 실제 대북관 운용은 자의적이다. 2005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박 대표는 편지에서 북한의 연호인 ‘주체’와 ‘북남’이란 용어를 구사했다. 어투 역시 ‘위원장님께 드립니다’로 시작해 시종 최고의 경어체로 일관했다. 편지 내용만 봐서는 ‘종북 빨갱이’ 그대로다. 그런데 누군가 이를 ‘문재인이 청와대 비서실장일 때 김정일에게 간 편지’라는 제목으로 박사모 카페에 올렸다. 박사모 회원들은 “북한 추종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북남이란 표현을” “마치 신하가 조아리는 듯하지 않습니까?” 등 거친 비난과 욕설을 쏟아냈다. 그러나 편지 쓴 사람이 박 대표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반응은 크게 달라졌다. “업무상 편지 좀 주고받은 것 갖고..
[여적]조선도공 후예 심수관 임진왜란·정유재란의 7년전쟁에서 끌려간 조선인은 5만~10만명에 달한다. 이 중에는 도공, 석공, 목공, 인쇄공, 제지공 등 기술자나 기능인이 유독 많다.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했다. 도공은 일본군의 표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인 도공을 납치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다. 일본이 ‘조선 도공 모시기’에 열을 올린 것은 당시 일본에 다도가 유행하면서 질 좋은 다기와 다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구태훈, ‘일본에서 꽃핀 조선의 도자기 문화’). 피랍된 조선 도공 가운데 널리 알려진 이는 이삼평(李參平)이다. 1598년 사가현으로 끌려간 이삼평은 아리타(有田)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토(고령토)를 발견한 뒤, 그곳에서 조선식 자기를 제작했다. 일본이 자랑하는 ‘히젠 도자기’의..
[여적]‘조선시대 3대 정원’ ‘주변의 산은 높더라도 험준하게 솟은 정도가 아니요, 낮더라도 무덤처럼 가라앉은 정도가 아니어야 좋다. 주택은 화려하더라도 지나치게 사치한 정도가 아니어야 좋다. 동산은 완만하게 이어지면서도 한 곳으로 집중되어야 좋다.’ 200년 전 서유구가 백과사전 에서 밝힌 집터 잡는(相宅·상택) 법이다.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분화되면서 사대부의 생활이 주거와 조경에 눈을 뜰 정도로 나아졌다는 증거다. 서유구가 터잡기, 집짓기 법을 얘기할 때 한양에는 저택과 정원, 별장들이 들어섰다. 사대문 안에서는 정동의 심상규 저택, 삼청동의 김조순 별장 ‘옥호산방’이 호화로움을 뽐냈고, 도성 밖에서는 서유구의 번동 별장인 자연경실, 홍양호의 우이동 소귀당이 입에 오르내렸다. ‘성락원(城樂園)’이 조성된 것도 이즈음이다. 성락..
[여적]‘남영동 대공분실’의 변신 김수근은 한국 현대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다. 김수근문화재단의 홈페이지에는 그의 작품 연보가 소개돼 있다. 대표작 ‘공간 사옥’(1971)을 비롯해 남산 자유센터(1963), 경동교회(1980), 인천상륙작전기념관(1982), 불광동성당(1982), 청주박물관(1985) 등 익숙한 건축물이 많다. 그러나 그의 건축 리스트에 ‘남영동 대공분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물론 재단이 공개한 작품연보에는 빠져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치안본부가 ‘국가보안 사범’ 전문 수사처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했다. 7층 벽돌 건물로 앞면을 제외하고는 창이 거의 없는 게 특징이다. 특히 5층은 빛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수직으로 작은 창을 냈다. 위압적이고 폐쇄적이다. 1987년 1월14일,..
[여적]톈안먼 광장 톈안먼(天安門) 광장은 명·청 양대 왕조의 황성인 베이징고궁(쯔진청)의 정문 앞 너른 마당을 말한다. 원래는 담장이 쳐진 궁정의 뜰이었으나 1914년 도시 정비를 하면서 광장의 면모를 갖췄다. 남북 880m, 동서 500m, 총면적 44만㎡(약 15만평) 크기로 도심광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광장 중앙에 인민영웅기념비와 마오쩌둥기념관이, 동서에 각각 중국국가박물관과 인민대회당이 있다. 톈안먼 광장은 중국 정치의 1번지다. 인민대회당 말고도 행정·사법부의 주요 건물들이 톈안먼 주변에 포진해 있다. 국가영도자들이 거주하는 중난하이 역시 지근거리다. 정치의 중심답게 중국 근현대의 사건, 집회·시위, 의전 행사가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919년 5월4일 베이징대학 등 시내 13개 대학생들이 톈안먼 광..
[경향의 눈]래여애반다라 지난해 지인이 말했다. “춘천박물관의 전시가 볼만합니다. 시간 내어 가보세요.” 얼핏 오백나한전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흘려들었다. ‘전시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춘천까지 가서 본단 말인가?’ 다른 사람이 또 그 전시를 추천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2018년 최고의 전시회’라는 얘기와 함께. 지난달 말 국립중앙박물관의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전’ 개최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지인의 말을 수긍했다. 전시장은 산사의 선방이었다. 은은한 조명을 받은 나한상들은 정진하는 스님 같았다. 좌대 위의 나한상은 제각각 다른 모습, 다른 표정이었다. 손을 모은 나한, 두건을 쓴 나한, 합장하는 나한, 가사를 걸친 나한, 바위 위에 앉은 나한, 보주를 든 나한 …. 한 자(30㎝) 남짓의 비슷한 크기의 나한..
[여적]서원과 퇴계 이황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지만, 그 반대도 적지 않다. 조선이 수입한 서원(書院)이 대표적이다. 서원은 당나라 말 혼란기에 지식인들이 산중으로 들어가 불교 선원을 본떠 만든 교육공동체가 시초다. 뒷날 향촌의 사립 교육기관이 된 서원은 송나라 때 꽃을 피웠다. 허난의 숭양(嵩陽)서원과 응천(應天)서원, 후난의 악록(岳麓)서원, 장시의 백록동(白鹿洞)서원은 송대 4대서원으로 꼽힌다. 이후는 쇠퇴기다. 명나라는 서원이 정치활동 장소로 변질됐다며 탄압했고, 청나라는 관학기관에 편입하려 했다. 조선에서는 1543년 세운 백운동서원이 효시다. 설립자는 주세붕이지만 서원을 세상에 알린 이는 퇴계 이황이다. 그의 건의로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최초로 정부 공인을 받았다. 퇴계는 ..
[편집국에서]성락원, 반가움과 아쉬움으로 만나다 전국 곳곳에 옛사람들이 바위에 글을 새긴 각석들이 남아 있다. 지금에야 처벌받아 마땅한 자연환경 훼손이지만 한편으론 역사와 문화 연구에 없어선 안될 1차 사료다. 각석은 조선시대 사대부 문인들이 많이 남겼다. 시를 짓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서화는 그들이 기본으로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개인적으론 물론 시를 짓고 즐기는 모임인 시사(詩社), 친목도모를 위한 계회(契會)도 결성해 자연 속에서 모임을 열고 심신을 수양했다. 그러고는 그 정취를 각자하거나 기록화인 계회도로 남겼다. 권력·재력을 겸비한 사대부는 한양도성 근처에 아예 별서(별장)를 지었다. 각석과 계회도, 별서는 모두 빼어난 자연경관과 밀접하다. 최근 서울 시내에 있는 조선 후기의 별서정원인 ‘성락원(城樂園)’을 둘러봤다. 그동안 특별한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