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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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문화재가 된 ‘활쏘기’ 은 조선 신궁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이다. 병자호란으로 누이가 포로로 잡혀가자 주인공 ‘남이’는 활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가 단숨에 적의 숨통을 끊는다. 애국심에 호소한 ‘국뽕 영화’이지만 잊혀져간 활쏘기 무예를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우리 민족이 유난히 활을 가까이 했다는 점은 고구려 벽화 ‘수렵도’만 봐도 알 수 있다. 한민족을 뜻하는 동이족을 ‘동쪽의 큰 활잡이’ 종족으로 풀기도 한다. 동이의 ‘이(夷)’ 자를 해체하면 큰 대(大)와 활 궁(弓)이다. 문헌에 보이는 단궁(檀弓:단군의 활), 맥궁(貊弓:맥족의 활)은 활의 역사가 오래됐음을 증거한다. ‘쏜살’ ‘긴장(緊張)’ ‘해이(解弛)’처럼 활과 관련된 어휘도 적지 않다. 옛날 활쏘기에 능한 이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화살이 버들잎을..
[여적]강산무진도 vs 촉잔도권 2009년 10월 초 국립중앙박물관은 13년 만에 일본에서 건너온 ‘몽유도원도’를 보려는 관람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2005년 용산중앙박물관 개관전에서는 8년 만에 공개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두 작품이 주목을 받은 것은 두루마리 대작으로 실물 공개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몽유도원도는 길이가 11m, 세한도는 15m에 달한다. 그러나 이는 감상을 적은 발문(跋文)을 포함한 것으로 순수한 그림의 크기는 몽유도원도가 38.7×106.5㎝, 세한도는 23.3×69.2㎝에 불과하다. 조선 회화의 진정한 대작은 이인문의 ‘강산무진도’(856×44.1㎝)와 심사정의 ‘촉잔도권’(818×85㎝)이다. 불화를 제외한다면 역대 회화 가운데 이들을 능가할 대작은 없다. 두 작품은 조선 후기 ..
[여적]삼국유사면 고려 말 간행된 의 저자는 수백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초간본이 전하지 않는 데다 현전하는 중간본(정덕본·1512년)에도 저자를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간본에는 저자의 서문이나 발문이 없다. 고려 문인 민지가 쓴 일연의 저서 목록에도 삼국유사는 보이지 않는다. 중간본 간행을 주관한 경주부윤 이계복이 ‘인각사 주지 일연’이라는 서명을 책 중간에 슬며시 끼워넣지 않았으면 삼국유사 저자는 미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일연 스님(1206~1289)은 경북 경산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9세에 출가해 국가 승려시험에서 최우등으로 합격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여러 절을 옮겨다니며 40대에 대선사가 됐다. 70대에는 ‘원경충조’라는 호를 받으며 국존에 봉해졌다. 스님은 생애 마지막 5년을 군위 인각사에 주석했다..
[조호연 칼럼]‘백선엽 논란’, 지체된 정의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에 대한 국립묘지 안장 찬반 논란이 불거졌다. 김병기·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립현충원에 묻힌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을 파묘해 다른 곳으로 옮기는 내용의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추진하면서다. 현재 서울과 대전 현충원에는 60여명의 친일파가 잠들어 있다. 두 국회의원은 나라에 헌신한 이들을 모시는 현충원에 친일파들은 묻힐 자격이 없기 때문에 강제로라도 이장해야 한다고 법 개정 취지를 설명한다. 이 내용대로 법 개정이 이뤄지면 백 장군은 사후 국립묘지 안장이 어려워진다. 보수 세력은 격렬하게 반대한다. 전쟁 영웅을 예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 일각의 논리는 도를 넘는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백선엽 장군은 6·25의 이순신인데, 현충원 안장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순신 장군은 반민..
[조운찬 칼럼]애이불상<哀而不傷>의 오월 정도상의 신작 장편 은 5·18민주화운동 시민군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간적 배경은 1980년 5월26일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15분까지 10시간 남짓이다. 최초의 5·18 기록물 는 물론이거니와 (임철우), (한강), (정찬주) 등 많은 ‘오월 소설’이 열흘간의 항쟁 전 시간을 포괄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 작가 정도상이 항쟁의 일부만 다룬 것은 오월항쟁의 진행과정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겠다는 뜻일 수 있다. 형식의 차별성이다. 그런데 작품을 읽다보면 의 특징은 형식보다는 주제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항쟁의 최후는 시민군의 쓰라린 패배다. 전남도청에 있던 시민군의 일부는 계엄군 진압을 앞두고 귀가한다. 남아있는 자는 총에 맞고, 군홧발에 차이고, 대검에 찔려 최후를 맞는다. 살아남는 ..
[여적]최서면의 근기(根器) 1969년 겨울 어느날, 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은 도쿄 고서점거리 진보초의 한 서점에서 보내준 ‘도서목록’에 눈이 꽂혔다. 를 확인한 그는 소장자(스에마쓰 교수)한테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국에서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세우는데 정작 안 의사 전기가 없으니 양보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최 원장의 열정에 감복한 소장자는 결국 책을 내줬다. 구전으로만 떠돌던 안중근 옥중 자서전의 실체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뒤 안중근숭모회 이사장인 노산 이은상은 를 국내에 번역 소개했다. 안 의사 탄생 100년을 맞은 1979년에는 을 펴냈다. 안중근 연구의 시작이었다. 최서면 원장 역시 연구자로 나섰다. 일본 ‘외교시보’에 발굴기를 소개한 최 원장은 이내 ‘안중근연구회’를 출범시켰다. 매일같이 외무성 외교사료관으로 출근해..
[기고]2·8독립선언의 주역 최팔용 1919년 2·8독립선언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페이지로 기록된다. 이어진 3·1운동 등 국내 항일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상해 임시정부 수립 등으로 이어지는 기반이 됐다. 또 독립운동이 민족 전체의 관심사로 부각되면서 독립운동의 열기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런 의미에서 2·8독립선언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도쿄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한 최팔용을 비롯해 김도연, 송계백, 이종근, 전영택, 윤창석, 김상덕 등 2·8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11인의 서명자들에 대한 연구는 아주 미흡한 수준에 머물고 있어 안타깝다. 특히 2·8선언의 리더였던 최팔용은 거의 잊혀진 독립운동가이다. 2·8독립선언은 1919년 2월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남녀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
[기고]‘중도유적’ 갈아엎고 레고랜드 지어야만 하나 지난해 12월 초 중도유적 현장을 방문했을 때 넓은 벌판에 높은 펜스를 쳐놓은 채 레고랜드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지상에 대형 철근콘크리트 기둥이 세워지고 있었다. 우려했던 문화재 대참사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중도유적은 1980년부터 1984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5차례에 걸쳐 발굴해 270여기의 유구를 확인하고 중도발굴보고서를 5권이나 내놓은 유적이다. 2010년까지 강원대학교박물관과 한림대학교박물관 등이 여러 차례 발굴·조사한 결과,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삼국시대 유적이 확인된 ‘통사적(通史的)’인 유적이다. 특히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주로 분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고고학 조사에 의하면 신석기시대 후기에 서해안 수위 상승으로 한강 하류 지역에 물이 차기 시작하면서 서울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