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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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옥바라지 골목 안악사건으로 체포된 백범 김구는 1911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 그곳에서 만 4년을 옥살이했다. 백범의 모친 곽낙원 여사는 형무소 맞은편 골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번 돈으로 아들에게 사식을 넣었다. 1919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가 갇혔던 곳도 서대문형무소다. 그의 옥바라지를 담당했던 누이와 동생들 역시 곽낙원 여사가 머물렀던 골목에 살았다. 서대문형무소는 한국 최초의 근대 감옥이다. 일제는 독립운동가와 정치사상범을 체포하는 족족 그곳으로 보냈다. 백범, 강우규뿐 아니라 유관순, 손병희, 김좌진, 여운형 등이 그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기결수감자만 평균 1500~2000명에 달했다. 자연스럽게 주변에 옥바라지하는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옥바라지 골목.’ 서대문형무소 건너편..
[여적]잃어버린 땅, 녹둔도 ‘조산(造山)의 요충지 녹둔도(鹿屯島)에 농민들이 흩어져 사는데, 골간(骨看·여진족) 등이 배를 타고 몰래 들어와 약탈할까 염려된다. 진장이나 만호에게 단단히 방어할 수 있도록 하라.’() 세조는 함길도 도절제사로 부임하는 양정(楊汀)을 경복궁 사정전으로 불러 이렇게 당부했다. 세종이 6진을 개척해 영토를 두만강까지 넓혔다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확장보다 더 어려운 게 수비였다. 6진의 행정체계가 완성된 뒤에도 여진족의 약탈은 계속됐다.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가 특히 심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녹둔도 기록은 대부분 여진족의 침략 이야기다. 이순신은 부친 삼년상을 마친 1586년 경흥의 조산 만호로 관직에 복귀한다. 이듬해 조산에서 십리 떨어진 녹둔도의 둔전 경영 임무까지 겸했다. 국경과 인접한 ..
[정인진의 청안백안 靑眼白眼]안중근의 전쟁과 평화 “탕! 탕! 탕! 탕! 탕! 탕! 탕!”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를 겨눈 브라우닝 M1900 권총에서 났던 총소리다. 이 총은 칠연발형이었으나 실제로 발사된 것은 여섯 발이었다. 세 발이 이토에 명중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수요(數謠)는 “육혈포로 칠 발을 쏜” 안중근을 기리며 그 총소리를 일곱 발로 듣는다. 제국주의는 무도하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적어도 조선에 관한 한 단순한 식민지배가 아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지적대로 그것은 독립국에 대한 강탈이고 침략이다. 더 나쁘다. 안중근은 이 침략에 대항하는 의병활동을 전쟁으로 규정한다. 안중근에 대한 일본의 재판은 법적으로 정당한가? 안중근의 거사가 이루어진 곳은 하얼빈역이다. 이곳은 청국의 영토이지만 러시아가 조차하여 동청철도의..
[여적]‘불후의 기록’ 탁본 1816년 7월 추사 김정희는 북한산 비봉에 올라 비석을 발견했다. 무학대사비로 알려진 비석이었다. 이끼 낀 비석을 만지니 글자가 보였다. 몇 번 탁본을 하니 진흥왕의 ‘眞(진)’ 자가 드러났다. 이듬해 6월 다시 비봉을 찾은 추사는 모두 68자를 판독한 뒤 진흥왕순수비로 단정했다. 북한산비의 발견은 조선 금석학의 시작을 예고했다. 자신감을 얻은 김정희는 본격 비석 조사에 나섰다. 경주를 돌며 진흥왕릉, 분황사 화쟁국사비, 무장사비, 문무왕릉비를 찾아 확인하고 고증했다. 그렇게 ‘깨진 빗돌을 찾아다니며(搜斷碣)’ 추사는 금석학자로 태어났다. 금석문에 대한 관심은 추사보다 이계 홍양호(1724~1802)가 빨랐다. 조선 명문가 자제였던 이계의 취미는 서화와 탁본 수집이었다. 그는 수집뿐 아니라 직접 탁본을..
[여적]조선통신사 임진왜란 직후 일본은 조선에 강화와 함께 무역재개를 요청했다. 새 집권막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쟁 도발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조선인 포로 160여명을 송환했다. 1604년 8월, 조선은 사명대사를 대표로 하는 ‘탐적사(探敵使)’를 파견했다. 사명대사가 일본 국정을 탐색하고 조선 포로 3000여명과 함께 귀국했다. 국교재개에 대한 반대여론은 여전했다. 조선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와 조선왕릉 도굴범 소환, 두 가지를 더 요구했다. 일본이 이를 수용하면서 조·일 국교회복은 급물살을 탔다. 1607년 1월12일, 여우길을 정사로 한 504명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사실상의 국교 재개였다. 그러나 사절단의 이름은 종래의 ‘통신사’가 아닌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다. 일..
[여적]‘재외동포’ 윤동주 중국 지린성 용정시의 윤동주 생가 입구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이라는 커다란 표지석과 함께 한글과 중국어로 새긴 ‘서시’ 시비가 있다. 기념물만 보면 윤동주는 중국어로도 시를 쓴 조선족 시인이다.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는 윤동주를 ‘중국 국적의 조선족’으로 소개한다.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중국 태생이니 중국인이라는 주장은 고구려·발해를 중국사에 편입시킨 동북공정과 다를 바 없다. 윤동주는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중국인이라고 생각한 적도, 중국어로 시 한 편 쓴 일도 없다. 용정중학 학적부와 일제 판결문에 적힌 윤동주는 모두 ‘조선인’이다. 그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한민족의 정서를 시에 담았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
[여적]사라지는 ‘이육사 순국지’ 중국에서 여행작가로 활동 중인 윤태옥씨가 지난 10일 베이징의 ‘이육사 순국지’ 철거 소식을 알려왔다. 윤씨는 페이스북에서 “육사 순국지 그 건물 남쪽과 동쪽의 평방이 철거되고 있다”면서 “순국지인 2층 벽돌 건물은 2차 철거한다고 현지 주민이 이야기한다”고 전했다. 그가 보내온 사진은 철거가 임박했음을 보여준다. 건물 주변은 폐자재로 어수선하다. 벽에는 ‘안전제일 예방위주’ 등 철거를 알리는 중국어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베이징시 둥청구 둥창후퉁 28호. 지난해 10월 경향신문 열하일기 답사팀과 함께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이육사 시인이 순국한 옛 일본영사관 감옥 건물은 퇴락했지만 원형이 보존돼 있었다. 당시 답사팀은 건물 마당에서 시 ‘광야’를 암송하며 사적지가 보존되길 기원했다(경향신문 2018년 ..
[편집국에서]비운의 문화재들, 제자리 찾아줄 때다 빼어난 조형미로 백제 미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는 국립부여박물관의 자랑이다. 이 향로를 보기 위해 부여를, 부여박물관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관람객이 늘자 박물관은 이 향로만을 위한 전시공간을 특별히 단장하기도 했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는 부여의 문화적 자긍심을 상징한다.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고마운 문화재다. 세계적 박물관에는 관람객들이 즐겨찾는 상징적 소장품이 있다.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밀로의 비너스’, 영국박물관의 ‘로제타 스톤’이나 ‘파르테논 마블스’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진품을 보기 위해 해마다 수백만명이 몰려든다. 문화재만이 아니다. 이름난 현대미술품을 소장한 미술관, 아름다운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스페인의 쇠락한 중소도시 빌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