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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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소홀해선 안될 가야역사문화권 정비 가야사 복원의 목적은 삼국의 역사로만 인식되고 있던 우리 고대사에 더욱더 풍부하고 다양한 역사가 실재했음을 국민에게 보여주자는 것이다. 가야사연구자로서 가야의 역사와 문화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고 역사적 사실로 정리하는 일에는 언제나 무한한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 과정과 결과는 현재를 사는 우리 국민과 공유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실천적 의미를 가진다. 문화유산은 과거 사실 자체로 현재의 우리를 과거로 통하게 하고 우리 미래의 보장과 발전을 지향하게 한다. 문화유산의 존재가치는 과거에 실재했던 역사와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임과 동시에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후손들을 위한 교육적 활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앞으로 진행되어야 할 가야역사문화권의 정비와 복원은 가야사에 대한 국민의..
[여적] 대도무문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징어는 뭐니뭐니 해도 ‘대도무문(大道無門)’이다.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직에 복귀한 김 전 대통령은 “대도무문, 정직하게 나가면 문이 열린다”고 밝혔다. “신의와 지조를 가진 사람만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혹독했던 독재정권 시절 선명 야당의 기치를 걸고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대도무문’의 길을 걸었다고 자부할 수 있겠다. 그러나 1990년의 ‘3당 합당’을 야합으로 규정한 야권으로부터 ‘대권무문(大權無門)’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또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도무문’ 글자를 새긴 시계가 대량 제작됐을 때는 ‘대도무문(大盜無門)’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1989년 ‘대도무문’의 휘호를 받은 당시 소련 대표단이 그 뜻을 묻자 ‘페레..
[여적]바둑외교 옛날 옛날에 삼형제가 살았다. 어느 날 분가하기로 결정하고 마당의 나무도 나누기로 했다. 하지만 땅을 파기도 전에 시들어버렸다. “원래 한 그루였던 게 나누려고 하자 죽는구나. 인간이라는 우리가 이 나무보다 못하구나.” 크게 깨달은 삼형제는 계획을 접었다. 그러자 나무도 다시 싱싱하게 활기를 되찾아 잎이 무성해졌다고 한다. 이런 전설을 간직한 까닭에 형제간의 우애와 가정 화목을 상징하는 나무로 마을에 많이 심었다. 인왕산 둘레길에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 나무는 봄에 진한 자주색의 꽃을 가지에 다닥다닥 밀집해서 피운다. 가을이면 열매가 꼬투리로 달리는데 그 안에 씨앗이 피붙이들처럼 오종종하게 들어 있다. 박태기나무이다. 10월 중순. 신문은 금강산에서 벌어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뉴스를 전한다. 설움..
[여적] 샤오황디 ‘샤오황디(小皇帝·소황제)’는 1980년 시작된 중국 1가정 1자녀 정책의 산물이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격동기를 겪은 부모 세대는 가난과 무지를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하나뿐인 ‘금쪽같은 내 새끼’를 꼬마황제로 떠받들며 키웠다. 이 정책은 중국 사회의 근간을 바꿔놓았다. 예컨대 샤오황디에겐 지갑이 6개나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친·외가 할머니·할아버지 4명과 부모 2명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자녀)에게 따로 용돈을 챙겨준다는 뜻이다. 집안에서만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성장한 샤오황디지만 막상 사회에 진출하면 웨광쭈(月光族)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웨광쭈는 매달(月) 타는 월급을 자신만을 위해 몽땅 써버리는(光) 사람들(族)을 가리킨다. 샤오황디로 자란 버릇을 버리지 못한 채 흥청망..
[시론]대한민국 관할권, 어디까지인가 역사 속의 사실을 밝히다 보면 우리에게 불리한 진실을 무시하거나 왜곡하고 싶지만,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경우가 있다. 대한민국 영토에 대한 논의가 이에 해당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 전체를 관할할 수 있는 한반도 내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기를 원할 것이지만, 대한민국은 남한의 합법정부로 승인을 받았고, 북한지역에는 국제사회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국가성이 존재하고 있다. 1947년 한반도 신탁통치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 이후 미국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유엔은 유엔감시하에 한반도 전체의 총선거를 실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임시위원단이 설립되어 한반도에 왔으나, 북한지역은 소련 점령군의 거부로 입국하지 못했..
[여적]혈서 기생에게 홀딱 빠진 남자가 ‘사랑한다’는 혈서를 써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기생의 집을 다시 찾은 남자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여자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남자가 “혈서까지 써주었는데 어찌 된 거냐”고 분기탱천하자 기생은 혈서를 가득 담은 보따리를 던졌다. “보따리에서 당신이 쓴 혈서 찾아가세요.” 웃자고 전해진 이야기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혈서는 그 무엇인가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전하는 강력한 수단이라는 점이다. 혈서의 대상은 사랑하는 여인처럼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가치일 수도 있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 김기룡·강기순 등 12명은 1909년 연해주에서 손가락을 끊어 혈서를 썼다. 혈서의 내용은 ‘대한독립’이었다. 남자현 선생은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이 괴뢰국인 만주국을 조사하..
[기고]조선의 천문학자 김담을 아시나요 세종이 다스린 15세기 전반 조선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다. 특히 과학기술에서 두드러진 성공을 거두었다. 세종대의 과학에서 가장 볼 만한 성과는 ‘제왕의 학문’ 천문학에서 나왔다. 왕조가 새로 시작하면 반드시 새 역법을 내게 되어 있으므로 천문학은 세종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일 수밖에 없었다. 김담(金淡)은 태종 16년(1416)에 태어나 세종 17년(1435) 문과 정시에 급제했고 집현전 정자로 뽑혔다. 김담은 역법을 맡고 있던 이순지(李純之)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승정원의 추천을 받아 발탁되었다. 세종은 이순지와 김담을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중국과 아랍의 역법을 연구하게 했다. 김담은 정흠지, 정초, 정인지를 이어 이순지와 함께 1442년에 의 편찬을 마쳤는데, 내편은 중국의 수시력과 대통력을 서울..
[시론] 상식과 역사적 사실 누가 뭐래도, 요즘 텔레비전의 대세는 ‘먹방’ 혹은 ‘쿡방’이다. 여러 방송국들이 서로 앞다투어 먹을 것을 가지고 다양한 종류의 음식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엉뚱한 발상인지는 몰라도, 필자는 유학 시절 역사학자와 요리사가 하는 일이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역사가에게 ‘역사적 사실’이 어떤 요리를 만들 때 들어가는 식재료 같은 거라는 유추 말이다. 김 치찌개를 만든다고 할 때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김치찌개에 들어가는 재료들이 모두 똑같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식재료가 있다 해도 누구나 김치찌개를 다 맛있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셰프’라고 불리는 요리사들이 요즘 들어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