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박세리, 가을에 떠난 ‘한국 골프의 나무’

오동잎 지면 가을인가. 이맘때면 어김없이 시즌을 마치고 작별하는 선수들이 이어진다. 올핸 유난히 큰 별 하나가 떠났다. 한국 골프의 개척자이자 전설인 박세리다.

 

지난 10월13일 LPGA 투어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1라운드가 끝난 인천 영종도 스카이72 오션코스에는 특별무대가 차려졌다. 박세리는 18번홀 내내 울며 샷을 하고, 500m의 페어웨이도 울며 걸어왔다. “영화 필름처럼 모든 것이 (머릿속을) 지나갔다”는 마지막 홀이었다. 대형 스크린에는 1998년 US오픈 우승 때 ‘맨발의 연못샷’ 영상이 떴다. 외환위기 시절 한국인의 가슴을 뻥 뚫어준 자칭 “내 인생 최고의 샷”이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상록수’ 노래가 흐르자 500여 팬들은 ‘사랑해 SERI’를 새긴 진홍색 목도리를 흔들었다. 박인비는 “우리 모두 언니를 본보기 삼아 여기까지 왔다. 감사하다”고 했다. 리디아고는 “저의 영웅이자 세계의 영웅”이라며 ‘THANKS SERI’라고 쓰인 검은 모자를 흔들었다. “저는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박세리도, 팬들도 울어버린 은퇴식은 골프사에 하나의 마침표를 찍었다.

 

 

등장부터 바람이었다. 박세리는 육상을 하다 초등 6학년 때 아버지의 권유로 골프채를 처음 잡았다. 그러곤 중3 때인 1992년 프로 오픈대회(라일 앤드 스콧)에서 우승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1995년 6월25일자 경향신문엔 18살의 앳된 사진을 더한 그의 인물기사(사진)가 처음 실렸다. 아마추어(공주 금성여고 3년)가 프로대회 첫 3관왕에 오른 기사였다. 골프대회 우승도 1단 기사로 다뤄지던 시절 박세리가 골프 기사의 물꼬를 튼 셈이다. 프로들이 “박세리 나오라”며 도전장을 내고, 경향신문의 ‘매거진X’ 머리기사로 240m의 장타를 날리는 ‘18살 신데렐라 여고생 골퍼 박세리’가 소개됐다. 그해 4개 대회 우승상금 1억1800만원은 아마추어였기에 모두 2위를 한 프로 선수에게 돌아갔다. 1997년 LPGA 테스트에 수석합격한 박세리는 다음해 메이저대회(맥도널드 챔피언십·US오픈)를 연거푸 석권한 뒤 LPGA 25승의 길을 걸었다. 그의 이력엔 ‘최초’가 많다. 중3 프로대회 우승, 한국 골프에서 한 해 상금 1억원 첫 돌파, LPGA 최연소 메이저대회 우승(당시 20세7개월)과 동양인 첫 명예의전당 헌액(2007년)이 그가 쌓은 인생급 기록들이다.

 

그의 골프는 굴곡이 크고, 그래서 더 극적이다. 2004년부터 2년간, 2007년부터 3년간 우승이 없어 온갖 루머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승 트로피로 긴 슬럼프를 빠져나온 것도 그였다. 오래전부터 ‘세리키즈의 맏언니’로 살아온 그는 올해 리우 올림픽 감독을 맡아 박인비의 금메달을 함께 일궜다.

 

첫 메이저리거 박찬호는 박세리의 은퇴식에서 “너와 난 나무다. 열매였던 적이 없다”며 “많은 후배 선수들이 열매가 됐고, 이제 그 열매를 따먹은 사람들이 또 다른 씨앗을 뿌릴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이면 40살이 되는 박세리에게 제2의 인생에 대해 물었다. 그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얼마전 세상을 떠난 아널드 파머를 떠올렸다. “선수의 눈으로” 골프를 사랑하고 헌신한 그를 롤모델로 삼은 것이다. 굿바이 세리, 생큐 세리, 굿럭 세리.

 

이기수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