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애민(愛民)과 외민(畏民)

민(民)이란 어원상 노예를 의미했는데, 통치 받는 사람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유가(儒家)의 민에 대한 인식에는 사랑과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다.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 ‘위정’편 제8장 ‘안민(安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유가에서는 “하늘과 땅은 만물의 부모요, 임금은 민의 부모”라고 한다. 유교의 정치논리는 자연의 원리를 인간사회에 유추하고 가(家)의 질서를 국(國)에 확장하는 방식이다. 군민(君民) 관계를 부모와 자식 관계로 의제하는 것도 그렇다. 이런 의제가 주는 역기능도 없지 않았지만, 지배관계가 폭력적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는 순기능을 한다.

군주의 직분은 “민의 부모 노릇하는 것”, 즉 민을 보호하고 기르는 것이다. 그러나 율곡이 개탄했듯이 군주가 부모 노릇 잘하기가 쉽지 않다. “오호!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많지만 민에게 어짊을 행하는 군주는 적으니, 하늘과 땅이 맡겨준 직책을 조금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애민(愛民)은 이처럼 부모·자식 관계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애민은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살핌으로 나타냈다. 가령 늙어서 아내 없는 환(鰥), 늙어서 남편 없는 과(寡), 늙어서 자식 없는 독(獨), 어려서 아비 없는 고(孤) 등 네 부류 사람들을 ‘세상에서 가장 곤궁한 민으로 호소할 데가 없는 사람들’로 보고, 우선적으로 돌보도록 했다.

율곡 이이 선생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돼 있는 자운서원 (출처 :경향DB)


그런데 외민(畏民)은 군주가 죄를 짓고 민심을 잃은 상황을 설정한다. 군주가 민심을 잃으면 ‘버림받은 군주(獨夫)’에 불과하게 된다. 이는 부모·자식으로 의제했던 것과 영 딴판이다. 이때 민은 시혜의 대상에 그치지 않고, 군주에 대한 신임을 거둘 수 있는 능동적 주체가 된다. 민의 대응 방식은 두 가지였다. 나라를 떠나는 것과 군주를 쫓아내는 것이다.

두려운 존재인 민에 대해 유형화한 것이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이었다. 가만히 법을 지키고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항민(恒民)이나, 모질게 수탈당하느라 시름하면서 윗사람을 탓하는 원민(怨民)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문제는 호민(豪民)이다. 호민은 몰래 딴 마음을 쌓으며, 기회를 틈타 원하는 바를 실현하려고 들고 일어난다. 그러면 항민과 원민도 따라서 일어난다. 호민이야말로 크게 두려워할 존재다.

요즘 세월호 참사로 민심이 좋지 않다. 민심을 잘 어루만져 주기는커녕 더 자극하는 사람도 있다. 율곡이 인용한 맹자의 말이다. “민심을 얻는 데는 방법이 있다. 바라는 바를 허여하고, 싫어하는 바를 베풀지 않는 것일 따름이다.”



김태희 | 실학21 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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