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여의주와 말똥구슬

“말똥구리는 제 말똥구슬을 아껴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고, 용 또한 여의주를 가졌다 하여 말똥구리의 말똥구슬을 비웃지 않는다.”

연암 박지원이 ‘낭환집서’에서 ‘진정지견(眞正之見)’을 말하면서 든 얘기다. 진정지견, 즉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규범적 판단이 너무 앞서거나 택일적 가치판단의 틀에 갇히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다. 우열의 척도를 접어두면 사물을 좀 더 제대로 볼 수 있을 텐데.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이런 얘기가 있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병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죽게 되지만, 미꾸라지도 그런가? 사람은 나무 위에 있으면 벌벌 떨지만, 원숭이도 그런가? 셋 가운데 누가 진정한 처소를 아는 것일까? 사람은 가축을 먹고, 사슴은 풀을 뜯어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부엉이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는다. 넷 가운데 누가 진정한 맛을 아는 것일까?”

미색(美色)은 어떤가. “원숭이는 원숭이와 짝을 짓고, 고라니는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노닌다. 모장과 여희를 보고 사람들이 아름답다 하지만, 물고기가 보면 물속 깊이 숨고, 새가 보면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고라니와 사슴이 보면 결사적으로 달아난다. 넷 가운데 누가 천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아는 것일까?”

조선시대 학자 연암 박지원


저마다 사는 곳이 다르고, 저마다 먹는 것이 다르다. 저마다 개성과 호감이 있다. 하나의 절대적 기준만으로 재단하고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오직 내 입장에서만 바라본다면(自我觀之) 인식의 한계가 분명하다. 인식 주체는 나일 수밖에 없지만,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다른 존재의 입장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장자는 하늘에 비추어 보라고(照之於天) 했다. 실학자 담헌 홍대용도 <의산문답>에서 말했다. “사람의 입장에서 물(物)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물이 천하며, 물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면 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보면 사람과 물 모두 균등한 것이다.”

저마다의 존재와 개성을 인정하는 것은 공존과 평화의 논리다. 서구 근대는 인종과 민족의 우열을 따졌다. 지배와 폭력의 논리다. 식민지 지식인 가운데는 자강(自彊)과 극복을 주장하다가 나중엔 강자에 복속하고 부역자로 전락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자기 비하와 부정, 오만과 멸시는 한 뿌리에서 나온다. 내 것을 아끼되 자만할 것 없다. 남의 것을 쓸데없이 부러워할 것도, 비웃을 것도 없다. 여의주를 부러워하랴, 말똥구슬을 비웃으랴!


김태희 | 실학21 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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