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

조호연 사회에디터 chy@kyunghyang.com






작은 체구에 깡마르고 날카로운 눈매의 40대 남자가 연단에 올랐다. 겨울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는 뾰족하고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취임 연설을 시작했다. 50년 전인 1963년 12월17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는 제5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경향신문은 이날 1면에서 대통령 취임식이 “엄숙하게 열렸다”고 보도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권력을 쥐고 군림하는 자가 되지 않고 국민의 충복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통합과 국민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럴 만도 했다. 가까스로 승리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43%를 득표했고, 야당 후보는 41%를 얻었다. 박 대통령이 5·16쿠데타 후 2년7개월간 강력한 군사통치를 한 것을 감안하면 이겼다고 하기 민망한 결과였다. 자연스럽게 소통과 통합 정치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선거에서 승리한 집권당이 독선과 횡포를 자행하며 소수의 의사를 유린할 때 또 다른 비극의 씨가 배태될 것”이라는 취임사는 출범 당시의 이 같은 정치상황을 염두에 둔 듯하다.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51.6%를 얻어 신승한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합과 소통을 강조한 것과 맥락이 비슷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시급한 민생문제의 해결과 민족자립의 지표가 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거듭 주창했다. 그러면서 국민에게 정신적 혁신운동을 제창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한 “범국민적 혁명 대열에의 적극적 호응과 열성적인 참여가 있기를 호소”한 것이다. ‘제2의 한강의 기적’을 거론하며 이를 위해 국민이 힘을 모아달라고 요청한 박근혜 대통령과 닮은꼴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취임 후엔 소통보다는 독선, 통합보다는 일방통행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자신이 취임사에서 언급한 것과 달리 “성서를 읽는다는 명목 아래 촛불을 훔치는 행위”를 한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5년 뒤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