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1997년 8월2일 박찬호 꿈의 10승

박찬호의 전성기는 고통스럽던 외환위기 때와 겹친다. 대기업들이 속절없이 쓰러지고, 실직자들이 거리를 메우던 시절, 끝이 안 보이는 긴 터널에서 국민들은 아주 잠깐이지만 ‘박찬호 보는 맛’에 살았다. 그는 대학 2학년이던 1994년 빅리그로 직행했다.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고 125년 메이저리그 사상 17번째였다. 차별과 편견의 설움 속에 살던 교민들은 “미국 이민 35년사에 가장 큰 경사”라며 감격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그는 단 2경기 만에 마이너리그로 추락했다. 훗날 그는 ‘죽음 같은 외로움’의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공주 촌놈’은 절치부심했다. ‘내겐 161㎞의 강속구가 있다’며 스스로를 담금질한 박찬호는 1996년 4월7일 마침내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첫 승을 따냈다.


 

 


1997년 박찬호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자신감이 넘쳤다. 그해 8월2일자 경향신문은 1면에 박찬호의 호쾌한 피칭 사진과 함께 ‘통산 10승 쾌거’를 전했다. 메이저리그 진출 3년 만의 대기록으로 ‘오리엔탈 특급’의 질주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이날 승리로 LA다저스 투수 중 처음으로 두 자리 승수를 올리며 에이스임을 각인시켰다. 불황에 지치고 폭염에 짜증난 시민들은 “위축된 가슴을 펴준 스포츠 대통령”이라며 환호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축전을 보내 고마움을 표시했다.

박찬호는 국민영웅이었다. 중계가 있는 날이면 직장인들은 상사의 눈치를 살피며 TV 앞을 맴돌았다. 국내 선수 이름은 잘 몰라도 마이크 피아자, 숀 그린, 에릭 케로스 등 LA다저스 선수 이름은 줄줄 뀄다. 사람들은 박찬호의 공 하나하나에 숨을 죽였다. 내로라하는 거포들이 코리안 특급 광속구에 쩔쩔매는 것을 보면서, 외환위기로 우울증을 앓던 대한민국이 위로를 받았다.

거침없던 그도 시련을 비켜갈 순 없었다. ‘두발당성 사건’이 있었던 1999년은 끔찍했다. 메이저리그 유일한 기록인 ‘한만두(한 이닝 만루홈런 두 방)’ 수모도 당했다. 하지만 박찬호는 삭발투혼으로 3년 연속 두 자리 승수를 올렸고 이듬해엔 보란 듯이 18승을 달성했다. ‘먹튀’ ‘한물갔다’는 비난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2005년 100승 고지에 올랐고, 2010년엔 통산 124승을 일궈내 일본의 노모 히데오를 제치고 아시아 출신 투수 최다승 위업을 달성했다.

박찬호는 어린이들에게 꿈을, 어른들에게 위로를, 한국 프로야구에 영감을 주었다. 그가 개척한 땅에 ‘박찬호 키드’들이 속속 입성했다. 류현진이 비록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지만 ‘괴물투수’로 인정받고 있다. 추신수도 시즌 초반 부진을 털고 다시 불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다. 야수로서는 처음으로 KBO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강정호의 활약이 특히 눈부시다. ‘7월의 신인’에 이어 올해의 신인상까지 거머쥘 기세다. 주변에서 “강정호 보는 맛에 산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만큼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이 답답하다는 뜻이겠다.



장정현 콘텐츠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