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한국전쟁 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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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좌우 양측에 가족 희생 채정자씨 기구한 삶 ㆍ할아버지는 군 토벌대에, 부모님은 빨치산에, 남편은 삼풍백화점사고로, 며느리는 암으로 ㆍ할머니 손에 눈물밥 먹고 자랐는데 할머니 되어 눈물로 손자들 키우네 글 김진우·사진 김영민 기자 “누가 들어나 줘? 아무도 우리 말을 안 들어줬지. 억울하고 가슴이 찢어져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지.” 채정자(69)·정옥(66)·삼순(63)씨 자매에게 60년 전 사건과 이후의 삶은 누구에게도 호소할 길 없는 가슴속 응어리다. 채씨 자매의 할아버지는 1949년 전남 함평에서 빨치산 토벌작전을 하던 군인들에게 총살당했다. 좌익 활동을 했던 5촌 아저씨를 찾지 못하자 할아버지를 대신 죽인 것이다. 더 큰 비극은 2년 뒤 찾아왔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마을을 장악한 빨치산에게 살해됐고, 갓난아기를 업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던 ..
(3)-2 “이제 와서 좌·우가 무슨 소용” 맞잡은 두 손 ㆍ전남 다도·구림 마을 김진우기자 전남 나주시 다도면 주민들은 지금 작지만 의미있는 결실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다음달 하순 한국전쟁 당시 이 지역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을 기리는 위령비 건립식을 갖기 때문이다. 이 위령비는 특히 좌·우 구분없이 희생자 모두를 기린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위령비 상석(床石)에는 ‘화해’를 상징하기 위해 계수나무 잎 안에 맞잡은 두 손의 모습이 새겨졌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다도면 일대에서는 한국전쟁 전후로 133명이 군과 경찰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116명이 좌익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일부 유족들이 처음엔 “서로 원수간”이라 꺼리기도 했지만 “이제 와서 상처만 덧나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취지를 설명하고, 2005년 좌·우 희생자를 아우르는 유족회..
(3)-1 민간인 학살 - 미완의 진실규명과 해원 ㆍ억울한 죽음, 덮는 정부 ㆍ진실화해위 이달말 종료… 명예회복 작업 중단 위기 ㆍ전쟁전후 희생자 100만명 “유족 상처 사회적 치유돼야” 김진우기자 민간인 학살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한국전쟁 전후 무고한 많은 민간인들이 군·경이나 인민군 등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지만, 반공주의에 의한 ‘기억상실’ 속에서 누구도 감히 학살의 얘기를 드러낼 수 없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남한에서 민간인 12만8936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집계됐다. 유가족 단체와 학자들은 한국전쟁 전후 학살된 민간인을 최대 100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희생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실규명 작업은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출범으로 첫 삽을 떴다. 하지만 우여곡절 ..
(2)-2 ‘또다른 이산’ 재일조선인 ㆍ분단 비극 고스란히 투영 ㆍ‘북송’으로 이중·삼중 고통 김진우기자 이산가족이라고 하면 대개 ‘납북자’나 ‘월남인’ 가족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넓은 의미의 이산가족에는 이들 외에도 월북인, 국군·인민군 미귀환 포로, 미귀환 공작원, 정전 이후 북한이탈주민 등 당사자와 가족을 포함한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에 거주하는 재외 이산가족도 있다. 특히 재일조선인은 전쟁과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는 ‘또 다른 이산가족’이다. 남북의 분단이 재일조선인 사회에도 그대로 반영됐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을 중심으로 한 재일조선인은 북한의 전쟁도발에 반대하고 642명이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고, 재일조선인연맹을 배경으로 한 이들은 반전평화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북한행 선박 객실에서 삼삼오..
(2)-1 이산 -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봉의 꿈 ㆍ‘정치’에 휘둘린 이산 상봉… MB정부 들어 한 차례뿐 김진우기자 # “나이가 많다 보니 정말 보고 싶은데, 갈 수도 없고 소식을 들을 수도 없어요. 그렇다고 안달복달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에요. 지금이야 더 하고.” 전화선 너머에서 윤모씨(78)는 허탈한 듯 “허허” 웃기만 했다. “단념하는 수밖에 없다”라고도 했다. 평북 영변 출신인 윤씨는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밀려내려오자 월남했다. 아내와 갓난 아들을 고향에 두고서였다. “3일만 있으면 다시 돌아온다”고 했던 게 벌써 60년이 됐다. 윤씨는 남에서 새로 결혼해 아들 둘, 딸 둘을 뒀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북에 두고 온 가족 소식이 더욱 듣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이산가족찾기 신청을 했지만 큰 기대는 안 하는 눈치다. “접수번호가 10만 ..
(1) 그들의 끝나지 않은 전쟁 ㆍ북으로 간 혈육 … 평생을 괴롭힌 주홍글씨 ‘빨갱이’ 김진우·손제민 기자 이들에게 한국전쟁은 60년 전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이들의 삶에서 한국전쟁은 각종 통계상의 숫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60년 가까운 삶을 지배해온 고통이자 상처였고, 생각과 행동을 제약한 족쇄였다. 북으로 간 가족을 둔 ‘죄’ 때문에 평생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지내기도 했고, 세상에 대해 이유없는 분노를 터뜨리며 ‘상이군인’으로 지내기도 했다. 한국전쟁 후 60년간 ‘또 다른 전쟁’을 치러온 이들 3인의 삶이 말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 납북자 가족 최상동씨 의용군 징집된 아버지, 60년 동안 ‘고통의 그늘’ 중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혼자 쓸쓸히 돌아올 때였다. 앞서 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꼭 아버지 같았다. 한국..
끝나지 않은 전쟁 손제민기자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체결로 한국전쟁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지 못한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한국전쟁이 파생시킨 다양한 구조적 문제들이 60년이 지난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어서다. 한국전쟁은 현대 한국을 규정하는 사회·경제·문화의 새로운 틀을 만들었다. 분단 고착, 한·미동맹과 전시작전권, 북한 핵, 반공주의와 냉전문화 등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낳았다. 또 이산가족, 민간인 학살 유가족, 상이군인, 간첩, 혼혈아동, 양공주 등 ‘새로운 사람’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이 남긴 문제들을..
(5) 한국인 6명의 증언 ㆍ南에선 “애국청년단이 목숨 좌지우지, 좌익은 린치 당했다” ㆍ北에선 “수확의 절반이 地代 … 인민군에 특별헌납까지 했다” 번역·정리 | 정진국(미술평론가) [1950년 9월 말, 수복 직후에 튀렌은 서울에서 박선옥(Pak Sun Ok)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튀렌이 전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950년 10월,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로 나온 평양 시민들. 마흔일곱살의 박선옥은 시장에서 잡화상을 했었다. (…) 그렇지만 1945년 미군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박씨를 자극했다. 다른 한국인들에게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승만 정부는 일제협력자에 반대하는 법(반민특위법)을 공표했지만 경찰이나 군대에 남은 이들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다. 박씨와 친구들에게 경찰은 악몽이었다. 즉, 경찰은 평화로운 시민들이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