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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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진 뒤에야 추사고택 안채에 중학생들이 빼곡히 앉아 있다. 한국도서관협회에서 주관하고 아산도서관에서 마련한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다. 한용운 생가, 김좌진 생가, 윤봉길 의사 기념관 등을 들러 온 마지막 탐방장소였다. 초빙강사인 신정일 선생은 청소년들에게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했다. “무릇 위대한 인물은 모두 고난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여러분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강철도 담금질을 통해서 강철이 되는 것이죠.”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듯 청소년들에게 자양분이 되길 기대해본다. 사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삶 이야기는 인생을 살아본 사람일수록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명문 양반가에서 태어나 20대에 북경에서 재능을 인정받은 국제적 인물. ..
탕론과 민주주의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민(民)을 나라의 근본이라 하여 중요시했다. 민본의식은 민주주의와 똑같진 않다.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글이 다산 정약용의 ‘탕론(湯論)’이다. 도대체 어떤 내용인가? “탕(湯)이 걸(桀)을 쫓아낸 것이 옳은가? 신하가 임금을 쳤는데 옳은가?” 이렇게 시작한 글은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말하고 있다. “천자는 어떻게 해서 생겼나? 하늘에서 내려와 천자가 되었나, 땅에서 솟아나 천자가 되었나? 다섯 가(家)가 인(린)인데, 다섯 가에서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인장(린長)이 되었다. 다섯 인이 이(里)인데, 다섯 인에서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이장(里長)이 되었다. 다섯 비(鄙)가 현(縣)인데, 다섯 비에서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현장(縣長)이 되었다. 여러 현장이 함께 추대한 사람이 제후가 ..
문자에 관한 두 걱정 한글은 대단한 발명품이다. 세종은 몇몇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친히 한글을 만들었다. 그런데 세종은 왜 이 작업을 은밀하게 추진했을까. 정사에 관해서는 늘 함께 의논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한글 창제를 알렸을 때 신하들의 반발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당시 한자를 배운 식자층과 한자를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으로 나뉘어 있었다. 중국과 한자만 존귀한 것으로 여겼던 신료들은 한자로 문자생활의 독점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들과 더불어 한글의 가치와 쓸모를 논의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웠다. 세종은 백성들이 문자의 불통으로 인해 억울함을 겪지 않도록 한글을 만들었다. 이로써 알겠다. 문자는 소통의 도구이건만, 문자로 인해 불통의 장벽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연암의 편지에 ‘문자나 글월로 쓰이지 않은 문장(不字不書..
실사구시와 양득중 옛 글에서 읽는 오늘양득중이 전근 명령을 받고 영조를 만났다. 그는 당시의 허위지풍(虛僞之風)을 낱낱이 열거하고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아뢰었다. 영조가 답했다. “‘실사구시’라는 말이 참 좋다. 내가 마땅히 이 넉 자를 편전의 벽에 걸어두고 항상 보도록 해야겠다.” 이때 양득중의 나이 65세였다. 그는 또 영조에게 세 가지 논설을 폈다. 첫째 영조가 탕평을 강력히 추진하려 했는데, 그는 아무리 좋은 취지라도 조급하게 조장하면 역효과가 날 것이라 경계했다. 대신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방안으로 제시했다. 둘째 영조가 인징·족징 등의 폐단으로부터 백성을 구제하려고 고심했는데, 그는 이미 율곡 이이가 제시한 해답이 있음을 밝혔다. 도망한 백성은 포기하고 그 부담을 이웃이나 가족에게 전가시키지 않으면 된다는 것..
금강산에 가는 이유 금강산은 예나 지금이나 가고 싶은 곳이다. 연암 박지원이 29세 때였다. 친구 둘이 금강산 유람을 함께 가자며 찾아왔다. 그러나 선뜻 응낙할 수 없었다. 부모님이 계시니 함부로 집을 떠나 먼 유람길에 오를 수 없었다. 돈도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명산은 젊을 때 한번 유람하는 게 좋다”며 권했다. 게다가 아는 분이 나귀 살 돈 100냥을 보내주었다. 연암은 짐꾼 희망자도 쉽게 구했다. 먼저 떠난 친구들을 따라잡았다. 금강산 안팎의 여러 명승지를 구경하고 만폭동에 이름을 새겨두고 돌아왔다. 총석정에서 일출을 보고 시를 짓기도 했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의 에 나온 이야기다. 다산 정약용은 벗이 금강산에 간다기에, 이들에게 글을 써주었다. 다산이 보기에 산은 많은 자원이 나와 이롭게 쓰여 생활을 풍요롭게 ..
단순화 효과 다산 정약용의 와 를 관통하는 숫자가 6이다. 는 이른바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의 6전에다 여섯 편을 앞뒤로 붙인 것이다. 이리하여 모두 12편인데, 각 편은 모두 6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일정한 수효에 맞추다보니 배치가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정형성은 전체적 파악을 용이하게 하는 면이 있다. 는 모든 국가 기구를 ‘이·호·예·병·형·공’의 6조에 속한 기구로 배치했다. 6조에는 각각 20개의 기구가 소속되어 모두 120개의 기구이다. 다산은 이처럼 수효를 정할 것을 강조했는데, 그가 강조한 것은 특정 수효가 아니었다. 어떤 수효든 일단 결정되면 그것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법을 제정한 후에 부득불 변통해야 한다면 20이라는 수효 안에서 혹 둘로 나누면서 하나를 줄이거나, 혹 하나로 합치면..
전쟁과 화친 “당(唐)나라 사람의 시에, ‘한 장수가 공을 이루자면 만 사람의 뼈가 마른다(一將功成萬骨枯)’고 했는데, 이는 뼈를 찌르는 말이다.” 전쟁에서 무공(武功)을 쌓았다는 것을 자랑할 것은 아니다.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의미이니까. “그러나 외부로부터의 모욕은 막지 않을 수가 없다. 혹 뜻밖에 강적이 쳐들어와 막으려면 나라 스스로 막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만약 평상시에 백성 기르기를 두텁게 하여 그 마음을 맺어 놓지 않으면 난에 임하여 장차 어떻게 힘을 얻겠는가?” 아군이든 적군이든 피를 보는 것은 백성이다. 용맹스러운 장수가 아니다. 전쟁이 불가피할 때 결국 백성들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전쟁의 일은 화친을 구걸해 그칠 수 있다면 화친하고 항복을 구걸해 그칠 수 있다면 항복할 뿐, ..
사이비(似而非)와 이름 그때는 옛글을 비슷하게 흉내 낸 글이 칭찬을 받았다. 연암은 다른 생각이었다. ‘사이비진(似而非眞)!’ 비슷하다는 것은 이미 참이 아니라는 뜻이다. 닮았다고 말할 때는 이미 다르다는 뜻이 전제돼 있다. 그래서 연암은 글 쓰는 이에게 옛글을 흉내 내려 하지 말고, 살아있는 눈앞의 정경을 말하고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라고 충고했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그런데 사이비(似而非)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단어다. 그것은 이름과 실제가 다른 가짜를 말한다. 짝퉁이란 말도 같은 맥락이다. 짝퉁은 명품의 세계를 어지럽힌다. 보기에 따라서는 짝퉁은 명품을 조롱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름과 실제가 어긋나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연암은 ‘명론(名論)’에서 말했다. “천하라는 것은 텅 비어 있는 큰 그릇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