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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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과 강녀 전설 만리장성에는 맹강녀 전설이 있다. 연암 박지원의 ‘강녀묘기(姜女廟記)’에는 이렇게 소개했다. “강녀(姜女)는 성이 허씨(許氏) 이름이 맹강(孟姜)이며, 섬서(陝西) 동관(同官) 사람이다. 범칠랑(范七郞)에게 시집갔는데, 진나라 장군 몽염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남편이 부역하다가 육라산 밑에서 죽었다. 남편이 아내 맹강의 꿈에 나타났다. 맹강이 손수 옷을 지어 혼자 천 리를 걸어 남편의 생사를 탐문했다. 두루 다니다가 여기서 쉬며 장안을 바라보며 울다가 이내 돌로 변했다고 한다.” 연암에 앞서 중국을 여행한 담헌 홍대용은 의 ‘연로기략(沿路記略)’에서 강녀 사당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정녀의 사당(貞女廟)은 산해관(山海關) 10리 밖에 있다. 들 가운데 작은 산록(山麓)이 갑자기 솟아나 흙과 돌이 섞..
여의주와 말똥구슬 “말똥구리는 제 말똥구슬을 아껴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고, 용 또한 여의주를 가졌다 하여 말똥구리의 말똥구슬을 비웃지 않는다.” 연암 박지원이 ‘낭환집서’에서 ‘진정지견(眞正之見)’을 말하면서 든 얘기다. 진정지견, 즉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규범적 판단이 너무 앞서거나 택일적 가치판단의 틀에 갇히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다. 우열의 척도를 접어두면 사물을 좀 더 제대로 볼 수 있을 텐데. ‘제물론(齊物論)’에 이런 얘기가 있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병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죽게 되지만, 미꾸라지도 그런가? 사람은 나무 위에 있으면 벌벌 떨지만, 원숭이도 그런가? 셋 가운데 누가 진정한 처소를 아는 것일까? 사람은 가축을 먹고, 사슴은 풀을 뜯어 먹고, 지네는 뱀을 달..
학교 일으키기 함양군 윤 사또가 고을의 한 정사(精舍)를 손질하여 ‘흥학재(興學齋)’라 이름을 붙였다. 자신의 녹봉도 보태 자금을 마련하고 서적을 비치했다. 안의현감 연암 박지원이 이 말을 듣고 ‘수령 칠사(七事)’를 상기했다. 칠사란 농상이 성하고(農桑盛), 호구가 늘고(戶口增), 학교가 일어나고(學校興), 군정이 정돈되고(軍政修), 부역이 고르고(賦役均), 소송이 드물고(詞訟簡), 간활이 사라지는(奸猾息) 것이다. 연암은 칠사 가운데 농상을 권면하여 생산을 높이고 호구를 늘리는 것이 급하긴 하지만, 무엇보다 수령이 먼저 해야 할 것이 ‘흥학(興學)’이라 여겼다. 연암은 지방 수령으로서의 책무를 크게 느껴, ‘함양군 흥학재기(咸陽郡興學齋記)’를 지어 벽에 걸어두었다. ‘흥학’이란 학교 또는 학문을 일으킨다는 것인데,..
재난구제 세월호 참사와 같은 재난에 관해 다산의 에는 언급이 없나요? 있다. ‘애민(愛民)’편 제6조 ‘구재(救災: 재난구제)’가 그것이다. ‘애민’편은 노인, 어린이, 곤궁한 자, 병자 등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왜 재난구제를 여기에 배치했을까? 재난의 고통은 사회적 약자일수록 심하게 겪고, 재난구제행정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할 수 없어서가 아닐까. 재난에는 늘 신속한 초동대처가 관건이다. “무릇 재난이 있으면 불에서 구하고 물에서 건지는 것을 내 것이 불타고 내 것이 물에 빠진 것처럼 조금도 늦춰서는 안된다(凡有災厄 其救焚拯溺 宜如自焚自溺 不可緩也).” 세월호 참사에서 아쉬웠던 점이다. 인근 어부들이 구조작업에 여념이 없을 때, 해경은 어찌 그다지도 냉정했던가. 재난은 사전예방..
애민(愛民)과 외민(畏民) 민(民)이란 어원상 노예를 의미했는데, 통치 받는 사람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유가(儒家)의 민에 대한 인식에는 사랑과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다. 율곡 이이의 ‘위정’편 제8장 ‘안민(安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유가에서는 “하늘과 땅은 만물의 부모요, 임금은 민의 부모”라고 한다. 유교의 정치논리는 자연의 원리를 인간사회에 유추하고 가(家)의 질서를 국(國)에 확장하는 방식이다. 군민(君民) 관계를 부모와 자식 관계로 의제하는 것도 그렇다. 이런 의제가 주는 역기능도 없지 않았지만, 지배관계가 폭력적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는 순기능을 한다. 군주의 직분은 “민의 부모 노릇하는 것”, 즉 민을 보호하고 기르는 것이다. 그러나 율곡이 개탄했듯이 군주가 부모 노릇 잘하기가 쉽지 않다. ..
자식 잃은 슬픔 공교롭다. 이미 정해진 실학기행 일정에 따라 주말에 안산(安山)에 갔다. 안산 성호기념관과 성호 묘소에 방문한 그날, 근방에는 임시분향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실학기행으로 찾곤 하는 성호기념관 옆에는 단원미술관이 있어서, 안산은 내게 실학자 성호 이익과 화가 단원 김홍도를 떠올리게 한다. 성호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다. 그는 33세에 얻은 외아들 이맹휴를 끔찍이 사랑했다. 아홉 살인 아들에게 ‘기삼백(朞三百)의 주(註)’를 계산하게 했더니 명료하게 뜻을 이해해서 기쁘다며 그 기쁨을 시로 읊기도 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 과거에 합격해 벼슬에 올랐다. 그런데 성호가 71세였던 해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성호가 느낀 슬픔이 어떠했을까? 그가 지은 시, ‘시름(愁)’에서 엿볼 수 있다. “시름은 푸른 바..
옛집을 읽다 지난 주말 한옥 구경이라는 뜻밖의 호사를 누렸다. 매주 옛글을 함께 읽는 동학(同學)들이 유적지 답사로, 계룡과 논산에 있는 사계고택(沙溪古宅)과 돈암서원(遯巖書院), 명재고택(明齋故宅)과 노강서원(魯岡書院)을 둘러봤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명재고택이었다. 명재(明齋)는 윤증(尹拯: 1629~1714)의 호다.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 문제로 스승인 송시열과 틈이 벌어졌다. 송시열은 친구 윤선거가 사문난적 윤휴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못내 못마땅했다. 이런 불만이 제자인 윤증에게는 아버지냐 스승이냐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결국 사제 관계는 어긋났고, 그 불화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맞물려 증폭되었다. 명재고택 주차장에 들어서니 바로 사랑채 건물이다. 사대부 가옥이면 응당 있어야 할 솟을대문이 없다. 후손이자..
봄날은 간다 바람이 바뀌었다. 산에 들에 동네에 꽃들이 앞을 다퉈 피고 진다. 완연한 봄이다. 봄에 관한 시를 찾아보았다. 에 실린 권벽(權擘, 1520~1593)의 ‘춘야풍우(春夜風雨)’라는 제목의 시가 눈에 띈다. ‘꽃은 비를 맞고 피어 바람에 떨어지니/ 봄이 오고 가는 건 이 가운데 있다네/ 어젯밤 바람 불고 비 오더니/ 복사꽃은 만발하고 살구꽃은 다 졌다네’ (花開因雨落因風 春去春來在此中 昨夜有風兼有雨 桃花滿發杏花空) 봄은 비에 젖고 바람에 흩날리는 가운데 지나간다. 요즘 봄가을이 짧아졌다고들 한탄하지만, 그제나 이제나 봄은 짧고 변화는 무상(無常)하다. 권벽의 다른 시로 ‘대월석화(對月惜花)’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꽃이 막 피었을 땐 달은 아직 덜 차고/ 보름달 환한 후엔 꽃은 이미 져버렸네/ 가련한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