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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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성공한 까닭 나라의 흥망은 인재가 제대로 쓰이느냐 마느냐에 달렸다. 너무도 평범한 진리다. 다산 정약용의 사론(史論) 가운데 하나인 ‘진지제업(秦之帝業)’도 같은 내용이다. “예나 이제나 진(秦)나라를 말하는 자는 오직 배척할 줄만 알지 마침내 제업(帝業)을 이루었고 거기엔 까닭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삼대(三代) 이래로 인재 등용에 정해진 틀에 구애됨이 없이 오직 인재에 급급했던 나라는(立賢無方 唯才是急) 진나라뿐이었다.” 가혹한 지배 때문이었다, 지록위마(指鹿爲馬) 같은 권력의 농간 때문이었다 등등 진나라의 멸망을 말하면서도, 진나라의 성공은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오랜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최후의 승자가 된 데엔 뭔가가 있었다. 바로 인재 정책이었다. 진나라는 외국의 인재도 객경(客卿)으로 영입했..
좋은 장수(將帥) 얻기 역시 장수가 중요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 비록 한국 축구대표팀이 우승은 못했지만 매우 인상적이었다. 왜 같은 선수인데도 감독에 따라 그토록 달라질까. 어느 감독 아래선 기대했던 스타가 실망스러운 플레이를 하는가 하면, 어느 감독 아래선 신예가 등장하고 베테랑도 다시 뜬다. 나라 간 각축이 치열했던 중국 전국시대에도 그랬다. 같은 조나라 병사이건만 조사나 염파가 이끌면 승리의 군대였고, 조괄이 이끌었을 때는 패전의 군대가 되었다. 좋은 장수를 얻는 것이 승패의 관건이었다. 연나라 소왕이 제나라의 공격으로 망할 지경에 즉위했다. 인재를 모아야만 했다. 곽외에게 그 방책을 물었다. “왕께서 인재를 부르고 싶으면 먼저 저 곽외부터 시작하십시오(先從외始). 저보다 현명한 인재들이 어찌 천리길을 멀다 하겠습니까..
허자와 실옹의 대화 허자(虛子)는 30년 동안 은둔하여 공부했다. 마침내 통달하여 세상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모두 비웃었다. “작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큰 이야기를 함께할 수 없구나.” 허자는 서쪽 북경으로 들어가 60일을 머물렀다. 끝내 상대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허자가 깊이 탄식했다. “지혜로운 사람이 모두 사라졌는가? 내가 배운 도(道)가 그릇됐는가?” 짐을 꾸려 돌아오는 길에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올랐다. 남으로 넓고 푸른 바다를, 북으로 큰 사막을 바라보니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마침내 세상을 등질 생각을 품었다. 수십 리를 걸어가니 ‘실거지문(實居之門)’이라 쓰인 돌문이 서있었다. “의무려산은 조선과 중국이 만나는 경계에 있고, 동북의 이름난 산이다. 반드시 숨은 선비가 있을 ..
연암이 당한 비방 북벌론이 등등하던 때다. 조경암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옛것을 좋아하여 검은 비단 모자와 예사롭지 않은 옷을 입고 다녔다. 하루는 두 학동을 데리고 구월산에 가는데, 차림새를 이상하게 여긴 산성(山城)의 별장(別將)이 졸개 두어 명을 거느리고 뒤를 밟았다. 구월산에 올라 조경암이 학동에게 “이 산의 본래 이름이 아사달산(阿斯達山)이다.” 말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별장이 “네가 오랑캐 옷을 입고 오랑캐 말을 하니 오랑캐가 아니고 무엇이냐?”며 포박하려 대들었다. 궁색해진 조는 머리를 드러내 상투를 보이며 말했다. “너는 상투 있는 오랑캐를 본 적이 있느냐?” 가까스로 봉변을 면한 조가 훗날 그 일을 회고하면서 덧붙였다. “그땐 머리털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지금처럼 나이 먹어 대머리였다면 어찌 됐겠소?” 연암 ..
우도할계(牛刀割鷄) 공자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이라는 작은 고을을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공자가 이 고을을 방문했다. 고을에서 거문고와 노랫소리가 들렸다. 공자가 빙그레 웃었다. 제자가 자신의 가르침대로 고을에서 예악(禮樂)에 의한 교화(敎化)를 펴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흡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쑥 말했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割鷄焉用牛刀)” 자유가 대답했다. “전에 선생님께서 ‘군자(君子)가 도(道)를 배우면 사람을 아끼고, 소인(小人)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고 말씀하신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진지한 답변에 공자가 주위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자유의 말이 옳다.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느니라.” 제자가 자신의 가르침을 잘 새기고 실천하는 것에 공자가 흐뭇해하는 모습이 선하다...
경세가 유형원 허생의 실력에 탄복한 변씨가 말했다. “지금 한창 사대부가 남한산성의 치욕을 씻고자 하는데, 이야말로 뜻있는 선비가 팔을 걷어붙이고 지혜를 펼 때요. 당신은 재주를 갖고도 어찌 괴롭게 어둠에 파묻혀서 이 세상을 마치려 하시오.” 허생이 답했다. “예로부터 어둠에 파묻혔던 분이 어디 한둘이었소? 반계거사 유형원은 군량을 조달할 능력이 있었으나 저 먼 바닷가를 거닐기만 했소.” 연암 박지원은 허생 이야기에서 세상을 경륜할 실력을 갖추고도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일생을 마친 대표적 사람으로 반계 유형원(1622~1673)을 예시했다. 성호 이익은 조선 개국 이래 시무를 알았던 사람으로 율곡 이이와 함께 반계 유형원을 꼽았다. 다산 정약용은 서문에서 재야에서 나라의 방책을 제시한 인물로 그를 거명했다. 유형원이 태..
미제(未濟)와 미생(未生) 며칠만 지나면 달력이 딸랑 한 장 남는다. 어떻게 한 해를 마무리할 것인가. 계절의 끝자락에서 을 읽는다. 제1괘 건괘(乾卦)는 용이 점차 성장하는 모습이다. 제1효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용(潛龍)은 제2효에서 모습을 드러내고(見龍), 제4효에서는 간혹 연못에서 뛰어오르기도 한다. 급기야 제5효에서는 하늘로 비상한다(飛龍). 그러나 제6효에서 분위기가 일전한다. ‘항룡유회(亢龍有悔)’, 높이 난 용은 후회가 있다. 이카루스의 추락을 연상시킨다. 항룡유회에 관해서, ‘상전(象傳)’은 “가득 찬 것은 오래갈 수 없는 것(盈不可久也)”이라고, ‘문언전’은 “궁극의 재앙(窮之災也)”이라고 풀이했다. 물극필반(物極必反). 지나친 욕심이 사족을 그리는 어리석음일 수 있고, 후회막심한 재앙을 부를 수 있다. 의 해석은..
새재를 넘다 며칠 전 무르익은 가을을 밟으며 문경새재를 넘었다. 문경의 옛길박물관 쪽에서 제1관문(주흘관)·제2관문(조곡관)을 거쳐 제3관문(조령관)을 넘어가는 길을 택했다. 이 길을 통해 옛 영남의 인재들이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갔다. 문경새재는 주변의 죽령이나 추풍령보다 선호되었다. 죽죽 미끄러지거나 추풍낙엽으로 떨어지지 말고, 문경(聞慶), 즉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문경새재는 영남대로의 주요 구간이면서 옛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부산에 이르는 옛길을 이른다. 영남대로 가운데 옛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영남대로의 효용이 여전하여 그 길 따라 철길이 지나고, 고속도로가 달리고 있다. 문경새재는 영남대로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새 길은 터널로 지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