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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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의 조제론(調劑論) 사림(士林)세력은 훈구(勳舊)세력에 의해 사화(士禍)를 겪었지만 끝내 승리해 조정을 장악했다. 도덕적 우위도 있었지만 학문 조직과 재정적 기반을 갖춘 결과였다. 이 무렵 영의정 이준경이 죽으면서 선조 임금에게 올린 짧은 상소문이 파란을 일으켰다. “붕당(朋黨)의 사사로움을 깨십시오. 오늘날 사람들은 과오가 없고 규칙을 위반한 일이 없더라도 혹 한마디만 합치하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습니다. 바른 몸가짐에 전념하지 않고 독서에 힘쓰지 않으면서 고담과 큰소리만 쳐 붕비(朋比·패거리)를 맺는 것을 고상한 취향으로 여겨 마침내 허위의 풍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는 붕당을 구실로 군자인 사림들이 소인들로부터 공격받아 또 사화와 같은 수난을 당할까 걱정했다. 이준경의 상소문에 대해 반박했다. 붕당 ..
욕구와 정치 학문이 탁월했던 정조는 신하들과 학문적 토론을 한 내용을 담은 56권을 남겼다. 학문적 토론은 바로 정치토론이기도 했다. 토론의 주 텍스트는 유교 경전이었다. 을 토론할 때였다. “전(傳) 10장에서 용인(用人)과 이재(理財)를 평천하(平天下)의 요도(要道)로 삼은 것은, 바로 에서 ‘지인(知人)에 달려 있고 안민(安民)에 달려 있다’고 한 것과 같다. 사람을 알아야(知人) 사람을 쓸(用人) 수 있고, 재물을 다스려야(理財) 백성을 편안케 할(安民) 수 있으니, 여러 성인들이 전하신 요결이 이처럼 서로 딱딱 들어맞는다.” , 즉 고요모(皐陶謨)에는, 사람을 알면(知人) 관직을 잘 줄(官人) 수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면(安民) 여민(黎民)이 잘 따르게 된다고 했다. 정조의 우등생이었던 다산 정약용은 에..
승자에 환호하는 까닭 정운창은 남쪽 바닷가 보성 사람이었다. 사촌형에게 바둑을 배웠는데, 5~6년 동안 문밖에 나가지도 않고, 먹고 자는 것조차 잊고 바둑에 몰두했다. 사촌형이 말했다. “아우야, 너무 수고 마라. 그렇지 않아도 행세하기에 충분한 실력이다.” 그래도 그는 매일매일 바둑의 수를 궁리하며 연마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정운창은 좁은 시골에서 자신을 상대할 자가 없자, 당대의 실력자와 겨루고 싶어 상경했다. 그의 목표는 당시 국수(國手)로 인정받는 김종기였다. 그런데 김종기는 하필 관서 순찰사의 식객으로 평양에 가 있었다. 정운창이 평양으로 그를 찾아갔다. 포정문 밖에 사흘을 머물며 기다렸지만 관리가 만나게 해주질 않았다. 그는 탄식했다. “선비가 재기(才器)를 지니고서 서로 만나지 못함이 어찌 이와 같은가. 나는..
시무(時務) ‘시무(時務)’란 그 시대에 힘써야 할 과제를 말한다. 성호 이익이 시무를 아는 사람으로 꼽았던 율곡 이이는 위정(爲政)편에 ‘식시무(識時務)’란 글을 배치했다. “시대마다 힘쓸 일은 동일하지 않아서 각 시대마다 마땅히 해야 할 바가 있다. 큰 요체를 간추려 보면 창업(創業), 수성(守成), 그리고 경장(更張) 세 가지다.” 창업에 관해서는, “요·순·탕·무의 덕을 가지고서, 세상이 바뀔 때를 만나, 하늘에 응하고 인심에 따라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면서 논의를 삼갔다. 수성은 성스러운 군왕과 현명한 재상이 처음 만든 제도가 좋은 효험을 보이면, 후세의 군왕과 재상이 이를 그대로 준수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성대함이 극에 달하면 중간에 미약해지고,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게 된다.” 이때가 바..
도인법 강진과 흑산도에서 각각 귀양살이를 하던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님 정약전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대신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엔 공부, 집안일, 세상살이 등 여러 이야기를 담았다. 학문에 정진하는 다산의 모습도 볼 수 있고, 두 형제의 따뜻한 우애도 느낄 수 있다. 편지엔 건강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다산 선생 나이 50세, 유배 11년째가 된 해 겨울이었다. 편지에서 다산은 형님의 건강을 걱정했다. 물고기 아닌 고기는 전혀 먹지 못한다는 형님에게 말했다. “흑산도에 있는 산개(山犬)가 천 마리, 백 마리뿐만이 아닐 텐데, 제가 그곳에 있으면 5일에 한 마리를 삶아 먹겠습니다.” 개를 잡는 기술을 상세히 소개하고, 박제가에게서 배운 개 요리법을 자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또한 도인법(導引法)이 유익..
새해와 건괘 “사의재(四宜齋)란 내가 강진에 유배를 가서 살던 방이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를 가서 처음 머물렀던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의 작은 방에 ‘사의재’란 이름을 붙였다. ‘매반가’란 밥 파는 집을 가리키니, 아마 술도 팔고 숙박도 했을 것이다. 그런 곳의 방 한 칸을 얻어 기거했다. 대역죄인이라 그마저도 감지덕지했겠지만 궁색한 것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 강진에 유배온 1801년 11월부터 매반가의 방에서 2년을 보내고 갑자년(1804) 새해가 시작되는 날, 다산은 그 방의 이름을 ‘사의재’라 짓고 ‘사의재기(四宜齋記)’라는 기록을 남겼다. ‘사의(四宜)’란 네 가지 마땅함을 가리키는데,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고, 외모는 마땅히 장엄해야 하고, 말은 마땅히 과묵해야 하고, 동작은 마땅히 중후해야 한..
정도전과 어진 정치 유배와 방랑을 겪던 정도전. 이성계의 군막을 찾아가 군기가 엄정한 군대를 보고 말했다. “이 군사라면 무슨 일이든 못할까?” 밖으로는 원(元)에서 명(明)으로 패권이 옮겨가고, 안으로는 권문세족과 신진 사대부가 대립하던 시기였다. 정도전은 현실문제에 해답을 주지 못하고 기득권의 온상이 된 불교를 비판하고, 유교의 나라를 꿈꾸었다. 정도전의 유교적 정치 기획은 그의 저서 에 잘 나타나 있다. 첫 항목인 ‘정보위(正寶位)’에서 군주권의 정당성 근거로 ‘어진 정치’를 들었다. “성인(聖人)의 큰 보배는 위(位)요, 천지(天地)의 큰 덕은 생(生)이니, 무엇으로 위를 지킬 것인가? 바로 인(仁)이다.” 만물을 살리는 천지의 마음을 군주가 본받아야 한다. ‘인정론(仁政論)’은 정도전 정치론의 출발점이었다. “임금..
유몽인과 옥사와 시 이조참판 유몽인은 거듭되는 옥사(獄事)에 불만이었다. “대단한 것도 없이 100명이나 연루되는 옥사를 일으키다니 도대체 어떤 자의 농간이란 말인가?” 광해군 시대, 대북파의 편협한 정국 운영으로 옥사가 끊이지 않았다. 서자로서 어렵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 역변(逆變)에 과민했던 탓도 있었다. 그날은 마침 술병을 들고 찾아온 벗이 있어 봄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기녀가 ‘백주’ 편을 노래하여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이때 하인이 달려와 얼른 추국(推鞫)에 참여하라는 명을 전했다. 헛된 옥사로 이 좋은 술자리를 망치다니. 유몽인은 추국청에 들어서 시를 읊었다. “꽃과 버들이 성안 가득해 봄놀이 즐기는데/ 미인이 술잔 놓고 백주 시를 읊네./ 장사가 홀연 칼을 들고 일어서니/ 취중에 늙은 간신 머리를 찍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