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읽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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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한국도서관협회의 인문학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옛길을 걸었다. 걷는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였다. 공주 공산성 앞, 금구향교, 태인 피향정(披香亭) 등지에 비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심지어 장성 갈재를 넘어가는 길가 바위에도 ‘영세불망비’가 새겨져 있었다. 옛날에 지방 수령이 좋은 정치를 베풀면 선정비(善政碑)를 세워서 기렸다. 공덕을 칭송한다는 의미로 송덕비(頌德碑)라 하기도 하고, 수령의 공적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영세불망비라 하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은 마지막 ‘해관(解官)’편에 ‘유애(遺愛)’ 항목을 두었다. 유애란 훌륭한 수령이 떠난 후에 사랑을 남긴다는 뜻이다. 수령이 정사를 잘 펼쳐 선정비를 세우거나 죽은 뒤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한글과 엘리트 “나는야 조선 사람, 조선시 즐겨 쓰리(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라고 읊었던 다산 정약용이지만, 그의 시문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다. 독자가 처음부터 한자를 아는 지식 엘리트층으로 제한되었다. 다산의 형인 정약종은 천주교 해설서 를 썼는데, 순 한글로 되어 있다. 부녀자 등 일반 대중도 읽기 쉬웠다. 천주교 대중화의 길이었다. 담헌 홍대용은 중국에 다녀온 기행기로 한문본과 한글본 두 가지를 남겼는데, 예상되는 독자가 달라 그 내용이나 체제도 살짝 달라졌다. 한글이 발표되자 반대론자들은 중화주의와 엘리트주의에 입각해 비판했다. 이에 대해 한글을 오로지 국수주의나 반(反)엘리트주의 시각에서만 볼 것은 아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다. ‘정음(正音)’이란 한자의 발음을 정확히 하는 것이..
단군과 기자 단군 이야기는 일연의 에 실려 있는데, 단군에 이어 기자를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주나라 무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한다.” 이승휴의 도 마찬가지다. “요동에 또 다른 세상이 있어, 우뚝한 게 중원의 왕조와 구분되네. 큰 파도 넘실넘실 3면을 둘러싸고 북으로 육지가 이어진 가느다란 땅, 가운데 사방 천리가 바로 조선이라.” 이렇게 하나의 지역 공동체를 설정한 후, 조선의 시조로 단군을 들고, 이어서 후조선의 시조로 기자를 들고 있다. 도대체 기자가 누구인가? 기자는 중국 은나라 주왕의 숙부이다. 주왕의 폭정에 간언하다 유폐되었는데, 주나라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고 갇혀 있던..
앉아서 천하를 안다 “방문을 나가지 않고 천하를 안다(不出戶 知天下)”란 말이 있다. 유득공의 글 ‘청령국지서(청령國志序)’는 이렇게 시작한다. “방문을 나가지 않고서도 사방 오랑캐의 사정을 아는 것은 독서하는 사람이 아니고선 불가능하고, 독서를 해도 뜻있는 선비가 아니고선 역시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이덕무를 ‘간서치(看書痴·책만 보는 바보)’라 불렀는데, 유득공은 말했다. “아, 나의 작고한 벗 이덕무가 어찌 한갓 독서만 하는 사람이었다 하겠는가?” 규장각 검서관인 이덕무와 유득공이 왕명을 받아 역대 병지(兵志)를 편찬하게 됐다. 초고를 완성해 임금 정조를 뵈었더니, 임금이 말했다. “이제 중국과 우리나라의 병제를 알게 됐다. 그런데 여진·몽고·일본·유구(琉球)도 우리나라 남과 북의 이웃이 아니냐? 그 나라 군사 제도를..
책만 읽는 바보 “남산 아래 한 바보(痴人)가 있었는데, 어눌해 말을 잘 못하고, 성격이 게으르고 둔하여 시무(時務)를 알지 못했다. 남들이 욕해도 따지지 않고, 칭찬해도 우쭐대지 않으며 오직 책 읽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춥고 덥고 배고프고 아픈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스물한 살이 되기까지 하루도 옛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중략) 사람들이 그를 보고 ‘간서치(看書痴·책만 보는 바보)’라 해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아무도 그의 전기(傳記)를 써주는 사람이 없기에 붓을 들어 그 일을 써서 이라 하고, 그의 성명은 기록하지 않는다.” 바로 이덕무(1741~1793)가 자신에 관해 쓴 글이었다. 이덕무의 에 나온 독서에 관한 글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덕무에게 독서는 ‘힐링’이기도 했다. “슬픔이 ..
이순신이 그리워 영화 과 그 흥행이 화제다.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기대감은 100여년 전 구한말 지식인 매천 황현(1855~1910)의 시 ‘이충무공귀선가(李忠武公龜船歌)’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시는 약 300년 전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거북선의 활약상을 통쾌하게 그리고 있다. “전라 좌수영 남문을 활짝 열고/ 북소리 둥둥 거북선이 나가는데/ 거북인 듯 아닌 듯 배인 듯 아닌 듯/ 판옥(板屋) 우뚝 솟고 큰 포말 일으키네./ 네 발은 빙글빙글 수레바퀴 되고/ 양 비늘은 펴서 창(槍) 구멍 만들었는데/ 스물네 개 노가 물결 밑에 춤추고/ 노 젓는 수군은 앉았다 누웠다 귀신같네./ 코는 검은 연기 내뿜고 눈은 붉게 칠하여/ 펴면 용 같고 움츠리면 거북 같은데/ 왜놈들 우우 울부짖고 겁에 질려/ 노량 한산에 붉은 피 흘러 ..
길을 헤매지 않으려면 도대체 도(道)란 무엇인가? 유가(儒家)에서 도란 중요한 개념이지만 설명하기 어렵다. 맹자는 “대저 도란 큰길과 같은 것인데,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이 구하지 않는 게 문제일 뿐이다”라고 했다. 연암 박지원은 도의 논설을 어렵다 하면서도 맹자의 이 말을 상기했다. ‘위학지방도발(爲學之方圖跋)’이란 글에서 말했다. “무릇 도(道)란 길과 같으니, 길로써 비유해보자. 동서남북으로 길 가는 여행자는 먼저 거리가 얼마나 되고, 양식이 얼마나 들며, 지나는 주막·나루·역참·봉후의 거리와 차례는 어떤지를 자세히 물어, 일목요연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실지(實地)를 밟고 평소 발걸음에 길이 평탄한 법이다.” 필자가 오랜만에 미국 여행에 나섰는데 길 찾기가 달라졌다. 전에는 자동차협회의 지도를 얻어..
인재가 없는 까닭 인사가 만사라는데 늘 인사가 문제다. 우리 사회가 인재난에 허덕이는 듯하다. 인재가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인재를 버리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이 ‘통색의’에서 신분으로 버리고, 지역으로 버리고, 당색으로 버리니, 인재를 구할 수 없다고 개탄했다. 그 논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인재가 귀한데, 정치적 진영, 지연과 학연, 친소관계를 이유로 인재풀을 좁혀 놓고선 인재가 없다고 한다. 둘째,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한유는 “천리마가 없는 것이 아니라, 천리마는 있는데 천리마를 알아보는 사람이 항상 있지는 않다”고 했다.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은 갖기 어렵다. 편견과 좁은 소견이 앞을 가려 인재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다. 셋째, 인재를 기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