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100년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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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바캉스 김민아 기자 makim@kyunghyang.com 또다시 돌아왔다. 1년에 한 번 ‘치르는’ 연중행사 바캉스의 계절이. 치른다고 표현한 이유는 언제부터인가 바캉스가 여름철 마쳐야 하는 ‘숙제’처럼 돼버린 탓이다. 원하는 때 장기 휴가를 쓸 수 있는 서구 노동자들과 달리, 대부분의 한국 노동자들에겐 여름철이 사나흘 이상 휴가를 낼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이니 어쩌랴. 바캉스(vacance)는 휴가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라틴어로 ‘비어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영어로 방학·휴가를 뜻하는 vacation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영어를 숭배하다시피하는 한국이지만, 바캉스만큼은 영어 vacation과 holiday를 눌렀다. 왜? 프랑스어가 좀 더 ‘폼’ 나니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푸른 바다에 뛰어든 바..
(35) 이발소 손동우 기자 sdw@kyunghyang.com 교과서나 대본소 만화 외에는 별다른 읽을거리 하나 없던 1960~70년대 보통 아이들이 ‘폭넓은 인문교양’을 접할 수 있는 장소는 엉뚱하게도 이발소였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상고머리’ ‘빡빡머리’ ‘니부가리’ 등 갖가지 형태의 헤어스타일로 머리를 깎으면서 극히 초보적인 형태나마 회화, 문학, 동양학 등에 대한 안목을 기를 수 있었다. 이발소의 인문학 교재는 이른바 ‘이발소 그림’이라고 불리운 모사복제화였다. 프랑스 화가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은 어느 이발소에 가더라도 거의 예외없이 걸려 있었다. 우리 농촌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그림 속의 풍경을 보면서 이발소 손님들은 자연스레 서양 회화에 접근할 수 있었다. 러시아 시인 알렉산데르 푸..
(34) 아이스케키와 아이스크림 윤민용 기자 vista@kyunghyang.com 매미는 울어대고 등목을 해도 더위가 가시지 않는 한여름 오후가 되면 꽁꽁 언 하드 생각이 간절했다. 더위에 지쳐 풀이 죽어갈 무렵, 엄마는 아이스크림을 사오라며 돈을 쥐여줬다. 하드 생각에 부리나케 가게로 달려가 아이스크림이 담겨 있는 보냉통 뚜껑을 열고 얼음주머니를 뺀 다음 깊숙이 손을 넣어 하얗게 김이 서린 하드와 콘을 빼냈다. 식구 수대로 아이스크림을 비닐봉지에 넣고 계산을 한 다음, 혹여 아이스크림이 녹을까봐 뛰어서 집에 돌아가곤 했다. 아이스케키를 사먹기 위해 몰려든 아이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냉동기술이 발달하고 상점마다 냉동쇼케이스가 보급되기 전만 해도 아이스크림을 먹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은 서양에서도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본..
(33) 영화관 김희연 기자 egghee@kyunghyang.com 컴컴한 극장 안. 가슴이 콩닥거렸다. 청초한 모습의 강석우와 이미숙이 마침내 첫 키스를 하려는 참이다. 빨개진 귓불과 점점 커지는 심장박동 소리. 혹여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자라목처럼 잔뜩 움츠리고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 2초 전, 1초 전…. 실눈 뜨고 그 아슬아슬한 순간을 맛보려는데 “꺄악~, 엄마야” 옆에 앉아있던 친구 경희가 소리를 내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영문도 모른 채 함께 비명을 지르고 극장 안을 빠져나왔다. 친구는 옆에 앉아있던 아저씨의 이상한 행동(?)에 놀라 소리쳤다고 했다. “지지배, 1초만 늦게 소리지르면 안됐냐. 너 때문에 못 봤잖아!” 속상했다. ‘탈선’에 목말랐던 시절, 선생님의 철통 같은 수비를 뚫고 야간 자율학습에서 어떻게 ..
(32) 미니스커트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신세계백화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판매한 가장 짧은 스커트 길이는 23㎝, 성인 남성 손바닥 한 뼘 정도였다. 올 여름도 미니스커트가 대세다. 젊은 여성을 위한 브랜드의 경우, 스커트 중 미니스커트가 80% 이상을 차지한다. 요즘 40대 여성들까지 과감히 허벅지를 드러내자 젊은 여성들의 스커트는 더욱 짧아지고 있다. 초미니, 마이크로미니를 지나 이젠 10억분의 1에 해당하는 과학용어를 빌린 ‘나노(nano) 미니’까지 등장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활보하는 여성들을 보고 어르신들이 “아니, 왜 아랫도리는 벗고 다니는 거여?”라고 놀랄 만도 하다. 1970년대 한 경찰관이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기 위해 젊은 여성의 치마 길이를 자로 재고 있다. 패션..
(31) 청량음료 김민아 기자 makim@kyunghyang.com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 윤형주씨가 만든 ‘오란씨’ CM송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CM송계를 풍미한 ‘불후의 걸작’이다. 요즘 이 노래가 20년 만에 다시 전파를 타고 있다. 동아오츠카가 ‘비타민C 탄산음료’라는 오란씨 신제품의 이미지를 알리기 위해 TV 광고를 재개했기 때문이다. 광고는 양 갈래로 머리 땋고 교복 입은 여학생의 모습에서 시작해 깜찍한 미니스커트 차림에 부츠를 신은 소녀의 모습으로 끝난다. 복고풍에서 최신 트렌드까지 망라한 셈이다. 1980년 한 잡지에 게재된 오란씨 광고. 왼쪽 위편의 오란씨 CM송 악보가 눈길을 끈다. 한국에서 청량음료가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은 1..
(30) 장학사 손동우 기자 sdw@kyunghyang.com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예!” “황실의 존호(尊號)를 말해 보아라.” “황제폐하, 황후폐하, 대공전하, 차레비치전하….” 장학사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번졌고, 선생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학사가 교실에서 나가자마자 마리는 선생님의 품에 뛰어들어 울음을 터뜨렸다. 1960년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퀴리 부인’의 한 대목이다. ‘마리 스클로도프스카’는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해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받은 퀴리 부인의 결혼 전 이름이다. 마리가 학교를 다닐 무렵 조국 폴란드는 러시아의 혹독한 식민지배 아래 있었다. 어느날 러시아 장학사가 수업 참관차 학교에 와서 식민지 학생들의 ‘국가관’을 점검했고, 선생님은 가장 똑똑한 ..
(29) 미장원 윤민용 기자 vista@kyunghyang.com 볕 좋은 날이면 엄마는 마당에 의자를 내놓고 아들딸을 차례로 불러냈다. 보자기를 목에 둘러씌우고는 기다랗게 자란 머리칼을 가위로 슥삭슥삭 잘라냈다. 동네 어느 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미용기술을 배운 적 없는 엄마의 커트는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어서 한동안은 바가지머리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당시 드라마 가 인기를 끌면서 적잖은 아이들이 바가지 머리를 하고 다녔지만 어린 마음에도 예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동안 엄마에게 불평을 했더니 효과가 있었나보다. 어느 날 엄마는 딸을 미장원에 데리고 갔다. 1982년 두발자율화 시대를 맞아 여고생들이 동네 미장원에서 자유로운 스타일로 머리를 손질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