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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볼펜과 필기구 윤민용 기자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 한동안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연필칼로 가지런하게 연필을 깎아주셨다. 갓 학교에 들어간 어린아이가 칼을 다루는 일은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얼마 안가 아버지가 ‘샤파’를 사다주시면서 어머니의 연필깎기는 중단됐다. 샤파에 연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드르륵 하며 연필이 깎이는 게 신기해서 계속 돌리다가 연필이 짤막해진 적도 있었다. 어른들은 연필심이 너무 날카로우면 찔릴 위험이 있다고 했지만 예리하게 잘 깎인 연필을 가지런히 줄맞춰 필통에 넣을 때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탐나는 필기구는 따로 있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언니가 쓰는 볼펜과 만년필이었다. 한번 잡아볼라치면 글씨도 잘 못쓰는 어린애가 함부로 볼펜을 쓰면 글씨체가 망가진다고 혼이 났다. 더 이상..
(10) 식모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순희 언니. 이란 시트콤을 보다 언니 생각이 났어요. 그 드라마엔 빚 때문에 아빠를 따라 산골로 들어가 살다 어린 동생을 데리고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세경이란 예쁜 소녀가 나와요. 뻥튀기 아저씨도 ‘곡물팽창업자’로 불리는 요즘, 식모란 원색적 단어가 약간 거북스러웠지만 ‘밥엄마’란 원뜻은 그리 나쁜 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처음 기억하는 세상 풍경은 언니의 등에 업혀서 본 모습이에요. 언니 등에 업혀 본 동네 사람들, 골목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언니는 6남매의 밥상 차리기만도 벅찼지만 늘 막내인 날 업고 엄마를 도와 청소와 빨래도 했죠. 진공청소기도 세탁기도 없던 시절, 언니는 한겨울에 찬물에 걸레를 빨면서도 구시렁대지 않고 노래를 흥얼거렸어요...
(9) 커피 김후남 기자 hoo@kyunghyang.com 1970년대 동서식품이 ‘맥스웰하우스’라는 상표로 인스턴트커피를 우리나라에서 직접 생산하기 전까지 커피는 귀하디 귀한 물건이었다. 엄마들은 커피를 식구들 모르게 꼭꼭 숨겨 놨다가 귀한 손님이 오실 때만 한 잔씩 타 드렸다. 손님이 떠나고 나면 아이들은 커피잔 바닥에 남아 있는 커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거나 커피잔을 코에다 갖다 대고 아직 가시지 않은 커피 냄새를 맡았다. 예쁜 잔에 다소곳이 담겨 우아하고 그윽하게 향기를 피워올리는 커피는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커피가 없는 현대인을 상상할 수 있을까? 아침이면 커피를 마셔야 눈이 뜨이고, 하루 일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면서 의식을 치르듯 커피를 마신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무언가 마무리하지 않은 듯한..
(8) 장 윤성노 기자 ysn04@kyunghyang.com 장날이다. 새벽, 아버지와 어머니 두런거리는 소리. “송아지 아침 잘 멕였구?” 어머니가 벌써 쇠죽을 쑤었는지 아랫목이 슬슬 달아오른다. 서울로 공부하러 간 큰형에게 보내려고 송아지를 팔러나갈 참이다. 어미소를 팔아야 돈이 아귀가 맞겠지만, 마을에 일소 있는 집이 몇 안 돼 마을일꾼으로 일할 어미소는 함부로 내다 팔 수도 없다. 아쉬운 대로 송아지를 팔아 급한 돈을 끄기로 했다. 어머니도 내다 팔 것을 챙기느라 부스럭거리고, 진즉 잠에서 깬 아이는 이불 속에서 송아지처럼 눈만 껌뻑였다. 읍면(邑面)을 지나 리(里)를 거쳐 마을이름에 ‘마을’ ‘말’ ‘뜰’ ‘뜸’이 붙어 있는 곳은 대개 10여 가구가 야트막한 산에 둘러싸여 살았다. 다랑이논 물꼬 보고 아침..
(7) 연애편지 유인경 선임기자 책장을 정리하다 낡은 책에서 발견한 편지 한 장. “왜 내 사랑이 네게 짐이 되는지 모르겠다. 너의 냉정함에 난 수취인 거부의 남루한 소포 꾸러미로 전락했다.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난 너의 의미가 되고 모든 것이 될 수 있는데….” 지금은 이름도 가물가물한 대학 선배가 보낸 연애편지다. 당시엔 시큰둥해서 무심코 읽던 책에 꽂아두었나 보다. 하지만 연애편지는커녕 손으로 직접 쓴 연하장 하나 못 받는 지금, 그 고색창연함조차 애틋하다. 누구나 한 번쯤 연애편지를 쓰고 받았다. 휴대전화도, e메일도, 메신저도 없던 시절엔 편지가 사랑의 전달수단이었다. 유치환의 ‘행복’과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등 유명한 연애시를 인용하고, 편지지만 수십 장씩 버린 뒤 새벽녘에야 ..
(6) 미제 아줌마 김민아 기자 makim@kyunghyang.com ‘아줌마’만 떴다 하면 동네엔 아연 활기가 돌았다. 주부들은 아줌마가 들고 온 커다란 가방 주위에 모여앉아 ‘별세계’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짭조름한 스팸과 리즈 크래커, 알록달록한 참스 캔디(먹고 난 캔디 깡통은 아버지의 재떨이로 쓰였다), 오렌지주스 가루 탱은 아이들을 유혹했고 엄마는 아이보리 비누와 레블론 샴푸, 맥스팩터 파운데이션, 손 튼 데 즉효던 바셀린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아내들은 남편을 위한 ‘당근’도 쇼핑 리스트에서 빼놓지 않았다. 애프터셰이브 ‘올드 스파이스’와 맥스웰 커피, 커피크림 ‘카네이션 커피메이트’ 등이었다. 이른바 ‘미제(美製) 아줌마’들은 움직이는 면세점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군 부대 구내매점(PX)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떼어..
(5) 싱크대 김희연 기자 egghee@kyunghyang.com 그 시절이었을 것이다. 코흘리개들은 할 일 없이 엄마의 치맛자락을 맴돌 듯 부엌 문턱을 수시로 오고갔다. 군것질은 물론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않던 시절, 부엌이라고 특별히 맛난 게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부뚜막에 올라앉았다가 빗자루로 맞거나, 한밤중 몰래 들어가 제사 전날 기름진 음식을 훔쳐먹다 혼쭐이 난 기억…. 부엌은 아이들에게 추억의 장소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에게 부엌은 징글맞은 곳이었다. 고된 시집살이가 대물림되는 혹독한 현장이었을 뿐 아니라 빈 쌀독과 마주하며 가난을 견뎌내야 하는 모진 곳이기도 했다. 더욱 서러운 것은 구부정한 허리와 관절로 힘겹게 부엌 문턱을 오르내릴 쯤이면 여자로서의 인생이 막바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옛 ..
(4) 달력 윤성노 기자 ysn04@kyunghyang.com 01/101960~70년대까지만 해도 기일(忌日)이나 생일은 음력으로 쇴다. 여성들은 시집 가면 시댁 식구의 음력 생일과 기일을 물려받아 챙겨야 했다. 하지만 양력으로 생활하다보니 음력은 잊고 살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특히 맏며느리는 달력에서 음력을 찾아 빨간 동그라미를 쳐놓거나 ‘할아버님 제삿날’ ‘아버님 생신’이라고 적어놓고서야 새해를 맞았다. 달력은 70년대 말까지도 흔한 물건이 아니어서 새해 선물 노릇을 톡톡히 했다. 번듯한 회사라도 다녀야 회사 달력을 타오지, 그렇지 않으면 은행이나 업소에서 주는 달력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하루살이 서민들에게 거래 은행과 업소가 있을 리 만무하니 달력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농촌에서는 구경조차 힘든 게 달력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