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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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양진격과 평양의 모습 ㆍ도시는 폭격에 지워졌다, 북한 사람들은 어디 있을까? ㆍ남한군 따라다니던 ‘청년 반공단’이 노략질을 일삼았다 번역·정리 | 정진국(미술평론가)· 손제민 기자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운 차량이 평양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 [9월15일부터 유엔군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인천상륙과 서울수복, 남한 전역의 탈환이 10월1일 일단락되었다. 유엔군이 시간을 끌지 않은 유일한 시기였다. (…) 미군 1기병사단은 10월9일에야 개성을 지났다. 그런데 이날, 남한 3사단은 이미 북한 내 깊숙이 원산까지 가 있었다. 남한군 선봉대가 북한에 처음 진입한 것이다. 도쿄(총사령부)에서는 처음엔 이 소식을 부인하다가, 그 뒤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일이 침투하기 매우 어려운, 동부 연안 지역에서 발생한 만큼 수일간 미확인 ..
(2) 인천상륙과 서울수복 ㆍ200여 척 함선의 상륙작전 … 이 야만적 공포를 뭐라 할까 ㆍ이름 김몽경, 중앙청 태극기 첫 게양자는 경찰이었다 번역 | 정진국(미술평론가) 상륙정을 타고 인천으로 향하는 미 해병 선발대. [튀렌이 인천에 대한 첫번째 기록을 남겼다.] 인천, 1950년 9월15일. 네 척의 프랑스 군함과 뉴질랜드 소형함정 두 척이 여름 한복판에 중국해를 가로질렀다. 이 행렬이 또다른 14척의 군함과 합류하면서 전쟁터를 실감케 했다. 그렇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건 상상하기도 힘든 광경이었다. 이 상륙작전의 야만적 공포와 장엄을 정말이지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새벽 5시. 작은 보랏빛 섬들이 촘촘히 수놓인 인천만에서, 붉게 물든 여명을 배경으로 미 해군은 지상군의 수치심을 보복하겠다는 듯이 위세를 보였다. 20여㎞에 걸쳐..
(3) 재일조선인의 인간적 권리 무망한가 ㆍ‘제국신민’서 ‘외국인’으로… 일개 관료가 간단히 ‘국적 박탈’ 윤건차 | 가나가와대 교수 한국에서 재일조선인은 역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재외동포이자 디아스포라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현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특히 매스미디어와 대학 등 연구기관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일반적으로 잘 알려졌다고 하기는 어렵다. 재일조선인을 얘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일본의 조선 식민지지배의 소산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지금도 옛 종주국인 일본에 살고 있으나, 대부분 한국이나 조선 국적 혹은 국적 표시를 갖고 있을 뿐 일본 국적은 취득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역시 하나의 민..
(26) 재봉틀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이 재봉틀을 믿고 원주로 왔어. 이 재봉틀 믿고 를 시작했지. 실패하면 이걸로 삯바느질한다, 다만 내 문학에 타협은 없다….” 작가 공지영씨는 생전의 박경리 선생을 원주에서 만났을 때 재봉틀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워하던 표정을 기억한다. 박 선생이 가장 아끼던 세 가지 물품은 재봉틀, 국어사전, 고향 통영의 목가구인 소목장이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가 자신의 유일한 재산이라고 자랑한 것도 6·25 때도 들고 다녔다는 낡은 재봉틀이었다. 작가든, 재벌 부인이든 궁핍한 시절을 이겨온 어머니들에게 재봉틀은 옷이나 생활용품을 만드는 마법의 기계이자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는 든든한 무기였다. 밤새 침침한 눈을 비비며, 시큰거리는 어..
(1) 미 해병대 부산상륙과 낙동강 전투 ㆍ프랑스 종군기자가 본 6·25 ㆍ육중한 전차 위에 몸을 싣는다, 전투가 다가온다 ㆍ“3% 주민이 땅 60% 가진 나라, 환상적인 드라마죠” 번역 | 정진국(미술평론가) “마침내 8월2일, 해병대를 가득 태운 첫 번째 함정 빅토리가 부산만으로 들어섰다. 필리프 도디는 둑에 있었다.” 이날 저녁, 이틀 동안 막막하게 기다리던 해병대가 도착했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팡파르를 울리며 환영식을 치렀다. 도시는 온 종일, 허탈에 빠진 듯했다. 지체되는 이유도 듣지 못한 채 새벽 4시부터 원군의 도착을 기다렸던 종군기자들은 전혀 낙관할 수 없는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었다. 오후 5시쯤, 한 선원이 우리에게 해병대 수송선단이 나타났다고 알렸다. 나는 즉시 초계정을 타고 멀리에 나타난 대형 선단 앞으로..
프랑스 종군기자가 본 6·25 번역·정리 | 정진국(미술평론가)·손제민 기자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발발된 지 60년이 됐지만 한반도와 동북아는 전쟁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실제 종전이 아니라 정전 중이며 아직도 서로 보이지 않는 대포를 쏴대고 있다. 들춰지지 않은 전쟁의 기록도 많다. 경향신문은 국내 최초로 프랑스 종군기자들이 기록한 한국전쟁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에서 생포된 인민군 포로들이 인식표를 목에 걸고 피복 지급을 기다리고 있다. 이 기록은 1951년 르네 쥘리아르(Rene Julliard) 출판사에서 펴낸 「한국으로부터의 귀환(Retour de Core'e)」(절판)에서 발췌한 것이다. 당시 연합군에 종군했던 AFP, 르 피가로 소속 네 명의 프랑스 기자(세르주 브롱베르제, 필..
(2) 헛되지 않은 10년 투쟁 ‘군인·군속재판’ ㆍ야스쿠니 합사 정부관여 인정한 日법원 “책임은 못물어” 아노 히데키 2001년 6월29일, 이날은 일본에서 진행된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 소송의 역사에서 뜻 깊은 날이었다. 일제 강점기 군인·군속 출신의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25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피해 보상, 야스쿠니 합사 철회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단소송을 벌인 것이다. 1년여간 소송지원단과 변호사, 피해자와 유족들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휴일도 없이 만나 원고들의 신상 파악과 진술서 작성, 번역에 매달렸다. 소송 진행을 위한 모금활동도 함께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십수년 동안 일본에서 강제동원피해자 소송 지원운동을 해왔던 많은 사람들이 이 재판 운동으로 결집했다. 이렇게 시작된 재한 군인·군속재판(이하 군군재판)은 2003년 6월12일 ..
(25) 소풍 윤민용 기자 vista@kyunghyang.com 따뜻한 봄의 기운이 충만해질 무렵이면 소풍의 계절이 돌아왔다. 초등학생들이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날이라면 그건 바로 방학식 하는 날과 소풍 가는 날이었다. 소풍 날짜가 정해지면 아이들은 며칠 전부터 안달복달했다. 평소 못먹던 군것질거리며 김밥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엄마는 소풍을 맞아 새 옷과 신발을 사주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서 새 옷을 얻어 입은 뒤에 사이다와 과자, 초콜릿 등을 집어대느라 바빴다. 엄마는 시금치와 오이, 당근, 노란 단무지와 길다란 소시지, 달걀을 샀다. 소풍 전날 밤 엄마가 김밥 재료를 밑손질하느라 바쁠 때, 아이들은 소풍가방을 싸느라 바빴다. 주머니가 잔뜩 달린 소풍가방을 꺼내서 돗자리와 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