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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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아이스케키와 아이스크림 윤민용 기자 vista@kyunghyang.com 매미는 울어대고 등목을 해도 더위가 가시지 않는 한여름 오후가 되면 꽁꽁 언 하드 생각이 간절했다. 더위에 지쳐 풀이 죽어갈 무렵, 엄마는 아이스크림을 사오라며 돈을 쥐여줬다. 하드 생각에 부리나케 가게로 달려가 아이스크림이 담겨 있는 보냉통 뚜껑을 열고 얼음주머니를 뺀 다음 깊숙이 손을 넣어 하얗게 김이 서린 하드와 콘을 빼냈다. 식구 수대로 아이스크림을 비닐봉지에 넣고 계산을 한 다음, 혹여 아이스크림이 녹을까봐 뛰어서 집에 돌아가곤 했다. 아이스케키를 사먹기 위해 몰려든 아이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냉동기술이 발달하고 상점마다 냉동쇼케이스가 보급되기 전만 해도 아이스크림을 먹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은 서양에서도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본..
(4)-2 복잡하고 일관성 없는 보훈제도 ㆍ정치상황따라 법률·예산 ‘뒤죽박죽’ 김진우기자 우리나라 보훈제도는 사회적인 무관심과 함께 지나치게 복잡하고 일관성이 없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보훈예산의 경우 재정여건이나 정치사회적 상황에 따라 결정돼 운용이 비효율적인 데다 보상금 위주의 불균형 구조라는 특징이 있다. 보훈예산이 전체 정부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년대 1%대 초반에서 올해 1.71% 정도까지 늘었다. 나라마다 예산편성이나 보훈제도가 다르므로 단순 비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하더라도 미국 2.7%, 호주 5.3%, 대만 8.2% 등에 비해서는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올해 보훈예산 중 76%인 2조6449억원을 보훈보상금이 차지할 정도로 편중이 심하다. 보훈 대상자가 지나치게 다양하고, 이에 대한 법적 근거가 일관성이 없다는 사실..
(4)-1 보훈 - 온전히 치유 받지 못한 상처 ㆍ‘국민의 의무’만 요구하고 ‘국가의 의무’는 소홀 김진우기자 ‘보훈’의 사전적 의미는 ‘공(勳)을 갚는다(報)’는 뜻이다. 따라서 국가적 의미에서 보훈이란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이들에 대해 공을 갚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국가는 오랫동안 ‘직무 유기’를 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이들이나 그 가족들을 정당하게 대우하지 않았고 적절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 용산 전쟁기념관에 설치된 한국전쟁 조형물. 나라를 위해 산화해간 이들의 시신 수습부터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시신을 찾지 못해 위패로만 모셔져 있는 한국전쟁 전사자가 10만3000여명에 이른다. 정부는 한국전쟁 50주년인 2000년..
(3)-3 좌우 양측에 가족 희생 채정자씨 기구한 삶 ㆍ할아버지는 군 토벌대에, 부모님은 빨치산에, 남편은 삼풍백화점사고로, 며느리는 암으로 ㆍ할머니 손에 눈물밥 먹고 자랐는데 할머니 되어 눈물로 손자들 키우네 글 김진우·사진 김영민 기자 “누가 들어나 줘? 아무도 우리 말을 안 들어줬지. 억울하고 가슴이 찢어져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지.” 채정자(69)·정옥(66)·삼순(63)씨 자매에게 60년 전 사건과 이후의 삶은 누구에게도 호소할 길 없는 가슴속 응어리다. 채씨 자매의 할아버지는 1949년 전남 함평에서 빨치산 토벌작전을 하던 군인들에게 총살당했다. 좌익 활동을 했던 5촌 아저씨를 찾지 못하자 할아버지를 대신 죽인 것이다. 더 큰 비극은 2년 뒤 찾아왔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마을을 장악한 빨치산에게 살해됐고, 갓난아기를 업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던 ..
(3)-2 “이제 와서 좌·우가 무슨 소용” 맞잡은 두 손 ㆍ전남 다도·구림 마을 김진우기자 전남 나주시 다도면 주민들은 지금 작지만 의미있는 결실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다음달 하순 한국전쟁 당시 이 지역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을 기리는 위령비 건립식을 갖기 때문이다. 이 위령비는 특히 좌·우 구분없이 희생자 모두를 기린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위령비 상석(床石)에는 ‘화해’를 상징하기 위해 계수나무 잎 안에 맞잡은 두 손의 모습이 새겨졌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다도면 일대에서는 한국전쟁 전후로 133명이 군과 경찰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116명이 좌익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일부 유족들이 처음엔 “서로 원수간”이라 꺼리기도 했지만 “이제 와서 상처만 덧나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취지를 설명하고, 2005년 좌·우 희생자를 아우르는 유족회..
(3)-1 민간인 학살 - 미완의 진실규명과 해원 ㆍ억울한 죽음, 덮는 정부 ㆍ진실화해위 이달말 종료… 명예회복 작업 중단 위기 ㆍ전쟁전후 희생자 100만명 “유족 상처 사회적 치유돼야” 김진우기자 민간인 학살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한국전쟁 전후 무고한 많은 민간인들이 군·경이나 인민군 등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지만, 반공주의에 의한 ‘기억상실’ 속에서 누구도 감히 학살의 얘기를 드러낼 수 없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남한에서 민간인 12만8936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집계됐다. 유가족 단체와 학자들은 한국전쟁 전후 학살된 민간인을 최대 100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희생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실규명 작업은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출범으로 첫 삽을 떴다. 하지만 우여곡절 ..
(2)-2 ‘또다른 이산’ 재일조선인 ㆍ분단 비극 고스란히 투영 ㆍ‘북송’으로 이중·삼중 고통 김진우기자 이산가족이라고 하면 대개 ‘납북자’나 ‘월남인’ 가족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넓은 의미의 이산가족에는 이들 외에도 월북인, 국군·인민군 미귀환 포로, 미귀환 공작원, 정전 이후 북한이탈주민 등 당사자와 가족을 포함한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에 거주하는 재외 이산가족도 있다. 특히 재일조선인은 전쟁과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는 ‘또 다른 이산가족’이다. 남북의 분단이 재일조선인 사회에도 그대로 반영됐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을 중심으로 한 재일조선인은 북한의 전쟁도발에 반대하고 642명이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고, 재일조선인연맹을 배경으로 한 이들은 반전평화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북한행 선박 객실에서 삼삼오..
(2)-1 이산 -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봉의 꿈 ㆍ‘정치’에 휘둘린 이산 상봉… MB정부 들어 한 차례뿐 김진우기자 # “나이가 많다 보니 정말 보고 싶은데, 갈 수도 없고 소식을 들을 수도 없어요. 그렇다고 안달복달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에요. 지금이야 더 하고.” 전화선 너머에서 윤모씨(78)는 허탈한 듯 “허허” 웃기만 했다. “단념하는 수밖에 없다”라고도 했다. 평북 영변 출신인 윤씨는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밀려내려오자 월남했다. 아내와 갓난 아들을 고향에 두고서였다. “3일만 있으면 다시 돌아온다”고 했던 게 벌써 60년이 됐다. 윤씨는 남에서 새로 결혼해 아들 둘, 딸 둘을 뒀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북에 두고 온 가족 소식이 더욱 듣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이산가족찾기 신청을 했지만 큰 기대는 안 하는 눈치다. “접수번호가 10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