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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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사할린 강제동원 한인 ‘70년 망향의 한’ ㆍ‘동토의 땅’서 얼어죽고 굶어죽고… 해방뒤엔 ‘잊혀진 존재’로 배덕호 | 지구촌동포연대 대표 이장호 감독, 김지미 주연의 영화 는 일제 식민시기 조선인 ‘명자’가 ‘아끼꼬’ ‘쏘냐’로 불리며 세 나라 국적을 가진 채 기구하게 살다가 끝내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머나먼 남사할린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는 게 줄거리다. 영화 주인공처럼 1905년부터 45년까지 당시 일본 땅이었던 남사할린(당시 일본명 가라후토) 전역에서 강제노역을 하다 망향의 한을 품고 구천을 떠도는 수만명의 조선인 혼령을 기억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사할린 돌린스크시 탄광마을 브이코프촌 조선학교 졸업사진. 해방 이후 남사할린 전역에서 운영되던 조선학교는 1963년 소련 행정당국의 폐쇄 결정으로 문을 닫게 되고, 이로부터 25년간 민족의 말과..
(39) 지하철 윤민용 기자 vista@kyunghyang.com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너를 다시 만났었지”로 시작하는 그룹 ‘동물원’의 노래가 발표된 것은 1990년이다. 노래 도입부에 지하철이 플랫폼으로 들어올 때의 기계음과 안내방송을 집어넣어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로 평가받았다. 노랫말 속에서 지하철은 세련된 도시의 감수성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지만 현실 속 지하철은 아비규환의 전장이었다. 같은 해 2월 구로역, 신도림역 등 서울의 주요 지하철역 20곳에는 신종 아르바이트가 등장했다. 만원 객차 안으로 승객을 밀어넣는 ‘푸시맨’이었다. 당시 서울이 인구 1000만명의 도시로 거듭나면서 아침마다 반복되는 출근전쟁은 신문 사회면의 주요 기사로 다뤄질 정도였다. 콩나물 시루, 지옥철 등 지하철의 별칭도 여러가지였다. 급기..
(12) 돌아오지 못하는 일제 민간징용자 유골 ㆍ日정부 ‘인간 존엄성’ 인식 부족이 ‘유골봉환’ 최대 걸림돌 고바야시 히사토무 |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사무국장 일제 강제동원희생자 유골 봉환의 어려움은 다른 역사문제와 과거청산이 그렇듯이 일본 사회가 여전히 민주화를 달성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유족에게 봉환되지 않은 유골의 대부분은 지시마(千島)열도, 사할린(樺太), 남양(南洋)군도, 중국 등 일본 본토 밖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것이다. 일본 국내에 남겨진 유골은 탄광·토목현장 등에 매몰된 채로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사찰 등에 안치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나 기업 어디에서도 1965년 한일회담 이후 반환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미쓰비시 여성 근로정신대원들이 기숙사에서 출근하고 있다. 한·일 두 나라 정부의 유골봉환 노력은 20..
(38) 여름방학숙제 김희연 기자 egghee@kyunghyang.com 작심삼일의 법칙은 여름방학에도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이번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3일 만에 후딱 숙제를 끝내고 실컷 놀아야지!” 해마다 반복되는 개학 하루 전날의 극심한 불안감과 몰아치기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결심이다. 그러나 40여일 후에나 제출할 숙제를 미리미리 해두는 새 나라의 어린이는 많지 않았으리라. 탐구생활 몇 쪽까지, 매일 일기쓰기, 공작만들기 계획은 3일을 못갔다. 아침 7시 기상, 오전 9시부터 숙제와 공부…. 색색으로 예쁘게 꾸민 여름방학 계획표는 제쳐두고 일단은 신나게 놀았다. 아이들은 여름방학이면 ‘곤충채집 숙제’를 핑계로 아침부터 날 저물 때까지 쏘다니며 놀았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러나 아이들은 여름방학의 대표적인 숙제..
(11) 중국 해남도 ‘조선촌’이 증언하는 일제의 만행 ㆍ형무소서 끌려가 노예처럼 일하다 학살 ‘한 맺힌 유골들’ 사토 쇼진 | 해남도근현대사연구회 회장 제주도에서 남쪽으로 약 1000㎞ 떨어진 곳에 대만이 있다. 대만에서 서쪽으로 1000㎞ 정도 떨어진 곳에 해남도(海南島)가 있다. 해남도 남단, 중국 하이난성의 싼아(三亞)시 교외 여지구진(枝溝鎭)이란 곳에 ‘조선촌’(朝鮮村)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 이 ‘조선촌’에는 지금 조선인은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다. 1943년 봄부터 일본정부·일본해군·조선총독부는 조선 각지의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던 사람들을 선발해 ‘조선보국대’에 편입시킨 뒤 해남도로 강제연행하기 시작했다. 44년 말까지 ‘조선보국대’는 여덟 차례에 걸쳐 조직되고 약 2000명이 해남도에 강제연행됐다. 2008년 10월 ‘조선촌’ 조선..
(37) 봉숭아꽃 물들이기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동네 화장품가게에서 솜털이 보송보송한 여학생들이 매니큐어를 고르고 있다. 방학을 맞은 해방감에 빨강, 초록빛깔의 매니큐어로 대담한 도전을 시도하려나보다. 각종 시험과 과외로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으랴. 이해가 되면서도 고운 소녀들의 손톱엔 화학제품보다 봉숭아꽃물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귀밑 1㎝ 머리를 강조하던 엄격한 선생님들도 여름방학이 끝난 후 복장검사에서 봉숭아물 들인 손톱만은 관대하게 봐주시곤 했다. 자연학습을 나온 어린이들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즐거워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단독주택이 대부분이던 시절엔 서울에도 마당에 봉숭아를 심는 집들이 많았다. 해마다 7~8월이면 줄기와 잎자루의 겨드랑이에서 봉숭아 꽃잎이 두세 개씩 ..
(10) 독도문제 본질과 해결 방안은 ㆍ‘영토분쟁’ 부각땐 더 꼬여, ‘역사문제’로 풀어야 실마리 김점구 | 독도수호대 대표 1905년 8월19일, 독도 동도 정상에 작은 건물이 세워졌다. 러일전쟁에서 동해의 해상권을 장악해 러시아 함대의 남하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 해군이 세운 독도망루다. 독도망루는 러일전쟁이 끝난 직후인 1905년 10월24일까지 약 2개월 동안 운영되다 철거됐다. 독도망루는 일본의 군사적 목적 때문에 설치되었고, 제국주의 침략과정에서 첫 번째 일본 영토에 편입된 희생물이었다. 일본은 영토편입에 이은 독도망루 설치를 위해 내무성의 비밀문서(37비을 337호)에 따른 내각회의를 열었다. 내각회의에서는 독도를 주인이 없는 섬으로 정하고, 무주지 선점을 근거로 영토편입 결정을 했다. 내각 결정은 1905년 2월22일의 시마네현..
(36) 바캉스 김민아 기자 makim@kyunghyang.com 또다시 돌아왔다. 1년에 한 번 ‘치르는’ 연중행사 바캉스의 계절이. 치른다고 표현한 이유는 언제부터인가 바캉스가 여름철 마쳐야 하는 ‘숙제’처럼 돼버린 탓이다. 원하는 때 장기 휴가를 쓸 수 있는 서구 노동자들과 달리, 대부분의 한국 노동자들에겐 여름철이 사나흘 이상 휴가를 낼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이니 어쩌랴. 바캉스(vacance)는 휴가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라틴어로 ‘비어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영어로 방학·휴가를 뜻하는 vacation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영어를 숭배하다시피하는 한국이지만, 바캉스만큼은 영어 vacation과 holiday를 눌렀다. 왜? 프랑스어가 좀 더 ‘폼’ 나니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푸른 바다에 뛰어든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