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

(82)
(18) 미니카세트 ‘워크맨’ 윤민용 기자 vista@kyunghyang.com 지난해 영국 BBC 매거진에 mp3플레이어 ‘아이팟’ 대신 일주일간 미니카세트 ‘워크맨’을 써본 13살 소년의 체험기가 실렸다. 소년은 테이프의 반대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 사흘이 걸렸으며 카세트테이프의 재질에 따른 종류를 뜻하는 메탈/노멀 스위치를 이퀄라이저로 오해했다고 고백했다. 원하는 곡을 듣기 위해 되감기와 빨리감기 버튼을 마구 눌러대다 아버지로부터 “(그러다) 워크맨이 테이프를 먹는다”는 소리를 듣고 며칠간 음악 없이 지냈다고 썼다. 소니의 초기 워크맨. 버튼 하나만 누르면 손쉽게 작동되는 요즘 mp3플레이어를 사용하는 10대들에게 미니카세트는 낯설고 불편한 기기다. 그렇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청소년들에게 미니카세트는 꿈의 기기였다. 일..
(17) 시계 김후남 기자 hoo@kyunghyang.com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생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회중시계가 오는 10일 경매에 나온다는 보도가 있었다. 스위스의 고급 시계 브랜드인 바셰론 콘스탄틴에서 제작한 것으로, 뒷면에 대한제국 문장인 ‘이화문(李花紋)’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당시 이러한 시계 한 개 값은 서울의 작은 기와집 한 채 값에 맞먹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것으로 추정되는 회중시계 | 연합뉴스 순종은 시계에 관심이 무척 많았다.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계가 있었다. 순종은 이 시계들이 시간을 알리기 위해 각기 다른 소리로 한꺼번에 울릴 때 매우 즐거워한 반면, 하나라도 종이 앞서거나 늦게 울리는 날이면 언짢아했다고 한다. 그는 덕수궁에 머물..
(16) 입학 윤성노 기자 ysn04@kyunghyang.com 다음주면 각급 학교에서 입학식이 치러진다. 옛날 초등학교 입학식 땐 코흘리개들이 거즈 손수건(신입생이라는 표지이자 코를 닦는 용도이기도 하다)을 가슴에 달고 ‘앞으로 나란히’를 했다. 부모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보지만 꾸중 가득한 엄마 아빠를 쳐다보고는 이내 주눅 들어 동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처음 보는 동무, 어색하던 것도 잠시. 아예 뒤돌아 장난질하느라 선생님 구령은 뒷전. 부스대는 아이들 열기에 언 땅도 제풀에 녹아 운동장은 온통 진창이다. 봄냄새 맡은 병아리처럼 아이들은 ‘하나, 둘’ ‘셋, 넷’ 선창에 후렴을 붙이며 교실로 들어갔다. 코 흘리며 동네를 쏘다니던 아이들은 봄마다 그렇게 학생이 됐다. 1960년대 말이니까 ‘초등학교’가 아니라 ..
(15) 양장점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요즘은 여고 졸업선물로 쌍꺼풀 수술을 해준다지만, 1970년대까지는 엄마들이 졸업하는 딸의 손을 잡고 양장점을 찾곤 했다. 칙칙한 교복 대신 산뜻한 투피스나 원피스를 입혀, 소녀에서 숙녀로 만들어주고 싶어서다. 온갖 원단과 패션잡지가 가득한 양장점에서 주인은 마법의 양탄자를 펼치듯 옷감을 펼쳐보이고 디자인을 설명했다. 1975년 양장점이 밀집된 서울의 거리. 경향신문 자료사진 “처음엔 이런 감색 정장이 단정해보이지. 같은 감으로 후레아(플레어) 스커트를 하나 더 맞춰 블라우스를 잘 받쳐 입으면 여러 벌의 효과를 낸다니까. 이탈리아 원단이 좋긴 하지만 비싸니까 국산도 괜찮아요. 얼굴이 예뻐서 뭘 입어도 잘 어울리겠네….” 칭찬에 우쭐해진 모녀는 디자인을..
(14) 도시락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수업시간보다 점심시간에 먹던 ‘도시락’의 추억이 먼저 떠오른다. 그땐 왜 그리 자주 배가 고팠을까. 점심시간에 먹어야 할 도시락을 2교시만 끝나면 허기져서 꺼내들곤 했다. 다이어트 열풍에 새처럼 조금 먹는 요즘 소녀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양은 도시락통에 꾹꾹 눌러 담은 밥과 멸치볶음, 노란 무짠지, 콩자반 등 소박한 반찬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어머니는 거버 이유식병이나 맥스웰 커피병에 김치를 담아주셨다. 때론 가방 속에서 허술하게 잠긴 김치 병뚜껑이 열려 버스 안에서 냄새가 진동할 땐 하얀 옷깃의 청초한 여학생 얼굴이 김치국물처럼 벌게졌다. 도시락의 유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시락밥과 표주박 물을 뜻하는..
(13) 목욕탕 김희연 기자 egghee@kyunghyang.com 한번씩 뜰채가 등장했다. 목욕탕 주인장은 긴 장대에 그물망이 달린 뜰채를 들고와 몇 차례 물위를 가로질러 둥둥 떠있던 ‘그것들’을 건져내곤 했다. 잠시 탕 밖에 나가있던 사람들은 다시 탕으로 들어가기 바빴다. 콩나물 시루처럼 비좁은 목욕탕은 사람들로 붐벼 엉덩이 붙일 데가 없었다. 특히 설날을 앞둔 목욕탕은 대한민국 사람들 누구나 꼭 한번은 가야 하는 곳이었다. 실상은 집에 온수가 나오지 않고 목욕탕이 없기 때문이었지만 깨끗한 몸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조상을 모시겠다는 순박한 마음들이 벌거벗고 장사진을 이뤘다. 목욕탕에서 씻어낸 것이 몸만은 아니었을 터. 요즘 아이들에게 구식 목욕탕은 체험학습 삼아 가볼 만한 곳일지도 모른다. 첨단 시설의 찜질방과 놀이기..
(12) 담배 윤성노 기자 ysn04@kyunghyang.com 1970년대에 담배 이름을 이어 붙여 글을 짓는 게 유행한 적이 있다. 일종의 말놀이인데, 이런 식이다. ‘새마을에서 단오에 청자를 만나 거북선을 타고 은하수를 건너 개나리 만발한 한산도에서 명승을 구경하고…’. 새마을, 단오, 청자, 거북선, 은하수, 개나리, 한산도, 명승은 70년대에 시중에서 팔리던 담배였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것은 17세기 초 광해군 연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은 오래됐어야 400년 전인 셈이다. 정작 광해군은 담배 냄새를 싫어해 조정 대신들이 정무를 논할 때 금연할 것을 명했다고도 한다. 효종 때 조선에 왔던 하멜의 에는 ‘조선 사람들은 담배를 좋아해 아이들도 4, 5세만 되면 담배를 피우며 남녀..
(11) 볼펜과 필기구 윤민용 기자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 한동안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연필칼로 가지런하게 연필을 깎아주셨다. 갓 학교에 들어간 어린아이가 칼을 다루는 일은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얼마 안가 아버지가 ‘샤파’를 사다주시면서 어머니의 연필깎기는 중단됐다. 샤파에 연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드르륵 하며 연필이 깎이는 게 신기해서 계속 돌리다가 연필이 짤막해진 적도 있었다. 어른들은 연필심이 너무 날카로우면 찔릴 위험이 있다고 했지만 예리하게 잘 깎인 연필을 가지런히 줄맞춰 필통에 넣을 때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탐나는 필기구는 따로 있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언니가 쓰는 볼펜과 만년필이었다. 한번 잡아볼라치면 글씨도 잘 못쓰는 어린애가 함부로 볼펜을 쓰면 글씨체가 망가진다고 혼이 났다. 더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