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역사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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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식모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순희 언니. 이란 시트콤을 보다 언니 생각이 났어요. 그 드라마엔 빚 때문에 아빠를 따라 산골로 들어가 살다 어린 동생을 데리고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세경이란 예쁜 소녀가 나와요. 뻥튀기 아저씨도 ‘곡물팽창업자’로 불리는 요즘, 식모란 원색적 단어가 약간 거북스러웠지만 ‘밥엄마’란 원뜻은 그리 나쁜 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처음 기억하는 세상 풍경은 언니의 등에 업혀서 본 모습이에요. 언니 등에 업혀 본 동네 사람들, 골목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언니는 6남매의 밥상 차리기만도 벅찼지만 늘 막내인 날 업고 엄마를 도와 청소와 빨래도 했죠. 진공청소기도 세탁기도 없던 시절, 언니는 한겨울에 찬물에 걸레를 빨면서도 구시렁대지 않고 노래를 흥얼거렸어요...
(9) 커피 김후남 기자 hoo@kyunghyang.com 1970년대 동서식품이 ‘맥스웰하우스’라는 상표로 인스턴트커피를 우리나라에서 직접 생산하기 전까지 커피는 귀하디 귀한 물건이었다. 엄마들은 커피를 식구들 모르게 꼭꼭 숨겨 놨다가 귀한 손님이 오실 때만 한 잔씩 타 드렸다. 손님이 떠나고 나면 아이들은 커피잔 바닥에 남아 있는 커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거나 커피잔을 코에다 갖다 대고 아직 가시지 않은 커피 냄새를 맡았다. 예쁜 잔에 다소곳이 담겨 우아하고 그윽하게 향기를 피워올리는 커피는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커피가 없는 현대인을 상상할 수 있을까? 아침이면 커피를 마셔야 눈이 뜨이고, 하루 일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면서 의식을 치르듯 커피를 마신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무언가 마무리하지 않은 듯한..
(8) 장 윤성노 기자 ysn04@kyunghyang.com 장날이다. 새벽, 아버지와 어머니 두런거리는 소리. “송아지 아침 잘 멕였구?” 어머니가 벌써 쇠죽을 쑤었는지 아랫목이 슬슬 달아오른다. 서울로 공부하러 간 큰형에게 보내려고 송아지를 팔러나갈 참이다. 어미소를 팔아야 돈이 아귀가 맞겠지만, 마을에 일소 있는 집이 몇 안 돼 마을일꾼으로 일할 어미소는 함부로 내다 팔 수도 없다. 아쉬운 대로 송아지를 팔아 급한 돈을 끄기로 했다. 어머니도 내다 팔 것을 챙기느라 부스럭거리고, 진즉 잠에서 깬 아이는 이불 속에서 송아지처럼 눈만 껌뻑였다. 읍면(邑面)을 지나 리(里)를 거쳐 마을이름에 ‘마을’ ‘말’ ‘뜰’ ‘뜸’이 붙어 있는 곳은 대개 10여 가구가 야트막한 산에 둘러싸여 살았다. 다랑이논 물꼬 보고 아침..
(7) 연애편지 유인경 선임기자 책장을 정리하다 낡은 책에서 발견한 편지 한 장. “왜 내 사랑이 네게 짐이 되는지 모르겠다. 너의 냉정함에 난 수취인 거부의 남루한 소포 꾸러미로 전락했다.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난 너의 의미가 되고 모든 것이 될 수 있는데….” 지금은 이름도 가물가물한 대학 선배가 보낸 연애편지다. 당시엔 시큰둥해서 무심코 읽던 책에 꽂아두었나 보다. 하지만 연애편지는커녕 손으로 직접 쓴 연하장 하나 못 받는 지금, 그 고색창연함조차 애틋하다. 누구나 한 번쯤 연애편지를 쓰고 받았다. 휴대전화도, e메일도, 메신저도 없던 시절엔 편지가 사랑의 전달수단이었다. 유치환의 ‘행복’과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등 유명한 연애시를 인용하고, 편지지만 수십 장씩 버린 뒤 새벽녘에야 ..
(6) 미제 아줌마 김민아 기자 makim@kyunghyang.com ‘아줌마’만 떴다 하면 동네엔 아연 활기가 돌았다. 주부들은 아줌마가 들고 온 커다란 가방 주위에 모여앉아 ‘별세계’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짭조름한 스팸과 리즈 크래커, 알록달록한 참스 캔디(먹고 난 캔디 깡통은 아버지의 재떨이로 쓰였다), 오렌지주스 가루 탱은 아이들을 유혹했고 엄마는 아이보리 비누와 레블론 샴푸, 맥스팩터 파운데이션, 손 튼 데 즉효던 바셀린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아내들은 남편을 위한 ‘당근’도 쇼핑 리스트에서 빼놓지 않았다. 애프터셰이브 ‘올드 스파이스’와 맥스웰 커피, 커피크림 ‘카네이션 커피메이트’ 등이었다. 이른바 ‘미제(美製) 아줌마’들은 움직이는 면세점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군 부대 구내매점(PX)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떼어..
(5) 싱크대 김희연 기자 egghee@kyunghyang.com 그 시절이었을 것이다. 코흘리개들은 할 일 없이 엄마의 치맛자락을 맴돌 듯 부엌 문턱을 수시로 오고갔다. 군것질은 물론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않던 시절, 부엌이라고 특별히 맛난 게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부뚜막에 올라앉았다가 빗자루로 맞거나, 한밤중 몰래 들어가 제사 전날 기름진 음식을 훔쳐먹다 혼쭐이 난 기억…. 부엌은 아이들에게 추억의 장소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에게 부엌은 징글맞은 곳이었다. 고된 시집살이가 대물림되는 혹독한 현장이었을 뿐 아니라 빈 쌀독과 마주하며 가난을 견뎌내야 하는 모진 곳이기도 했다. 더욱 서러운 것은 구부정한 허리와 관절로 힘겹게 부엌 문턱을 오르내릴 쯤이면 여자로서의 인생이 막바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옛 ..
(4) 달력 윤성노 기자 ysn04@kyunghyang.com 01/101960~70년대까지만 해도 기일(忌日)이나 생일은 음력으로 쇴다. 여성들은 시집 가면 시댁 식구의 음력 생일과 기일을 물려받아 챙겨야 했다. 하지만 양력으로 생활하다보니 음력은 잊고 살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특히 맏며느리는 달력에서 음력을 찾아 빨간 동그라미를 쳐놓거나 ‘할아버님 제삿날’ ‘아버님 생신’이라고 적어놓고서야 새해를 맞았다. 달력은 70년대 말까지도 흔한 물건이 아니어서 새해 선물 노릇을 톡톡히 했다. 번듯한 회사라도 다녀야 회사 달력을 타오지, 그렇지 않으면 은행이나 업소에서 주는 달력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하루살이 서민들에게 거래 은행과 업소가 있을 리 만무하니 달력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농촌에서는 구경조차 힘든 게 달력이어..
(3) 전화 유인경 선임기자 “보고 싶어요, 엄마. 하늘나라에서도 제 목소리 들리세요?” 드라마 에서 처음으로 집 전화가 개통돼 온동네가 떠들썩하던 날, 어머니(김혜자)는 가족들이 잠든 밤에 홀로 전화기를 붙들고 돌아가신 친정엄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전했다. 새 학년이 되면 담임선생님이 “집에 전화기 있는 사람, 텔레비전 있는 사람…손들어봐요”란 가정환경조사를 할 때마다 번쩍 손드는 학생들의 표정은 의기양양했다. 이장희는 히트곡 ‘그건 너’에서 헤어진 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라고 노래했다. 신세대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불과 30여년 전의 풍경이다. 대한민국에 전화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96년. 이듬해 고종은 자신의 침소와 정부 각 부처를 잇는 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