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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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 전사 박노해, 카메라를 들다 1980년대 초 박노해(59)는 ‘얼굴 없는’ 시인이었다. 그는 노동해방을 갈망했다. 박기평이란 본명 대신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이란 뜻의 필명을 쓴 것도 그 때문이다. 벼린 칼날 위에 선 것 같았던 그의 청년 시절은 고단했다. 그는 2004년 시집 출간 20주년을 맞아 쓴 시 ‘스무 살의 새벽노래’에서 슬픔과 분노로 점철된 젊은 시절을 회고했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많은 강을 건너고/ 많은 산을 넘었다/ 새벽은 이미 왔는가/ 아직 오지 않았는가//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부으며/ 온몸으로 부르던 새벽/ 그때 우리는 스무 살이었다.’ 그는 이 시대 청년들을 향한 고언(苦言)처럼 ‘스무 살 가슴에 아픔이 없다면/스무 살 가슴에 슬픔도 분노도 없다면/ 그 가슴..
컴퓨터 백신 만든 ‘젊은 천재’ 안철수 경향신문 1991년 7월7일자 27면에 “컴퓨터 ‘공부벌레’ 사장님 됐다”는 기사가 등장했다. 기사는 “20대 대학생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각종 소프트웨어(운용 프로그램)를 개발, 컴퓨터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로 시작했다. ‘한국판 빌 게이츠를 꿈꾸는 젊은 천재들’이 만든 프로그램으로는 서울대생 이찬진씨팀이 개발한 한글 워드프로세서가 처음 꼽혔다. (주)한계소프트의 한글 소프트웨어, 조선대생 유승룡씨가 개발한 통신용 소프트웨어 ‘메디콤’, 서울대 윤재수씨의 통신용 소프트웨어 ‘한토크’, 단국대 의대 강사 안철수씨의 ‘백신Ⅱ 플러스버전’ 등이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프로그램들이라고 했다. 이는 2일 창당한 국민의당 안철수 공동대표가 경향신문에 처음 등장한 기사다. 당시 기사는 “미생물학을 전공하고 있는 안..
[경향으로 보는 ‘그때 그 사람’]12번째 별을 단 박래군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사회봉사활동 160시간.’ 유죄였다. 다섯 번의 옥살이 끝에, 징역형·벌금형으로 쌓인 ‘별(전과)’만 12번째다. 세월호 미신고 집회들을 열고 해산에 불응했다고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에게 대표 책임을 물은 것이다. 허탈한 얼굴로 지난 22일 서울중앙지법 법정을 나선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55)는 기다리고 있던 아내를 껴안았다. 헐벗은 현장과 법정·감방만 오가는 그를 대신해 생업(초등학생 글쓰기 학원)을 하며 아이들을 키워온, 그의 표현대로 “조강지처”였다. “나 하나 가둔다고 흔들릴 싸움이 아니다.” 세월호는 그의 인권수첩에 첫 옥중인터뷰(2015년 7월24일 경향신문)와 별 하나를 남겼다. 어김없었다. 세월호 선고에 항소 뜻을 밝힌 다음날, 박래군은 현장에..
밀사가 된 ‘기름장어’ 반기문 내 고향 행치마을’이라는 동요가 있다. “충북 음성 행치마을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네/ 소년시절 영어 잘하는 신동이며 외교관을 꿈꾸었던/ 굳은 그 신념 세계 속에 영원한 꽃을 피웠네…” 2007년 음성동요학교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취임을 축하하고 아이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만든 일명 ‘반기문 동요’다. 반기문 하면 대중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부드러움이다. 하지만 고향사람들은 굳은 신념을 떠올린다. 동요에 나오듯 반기문은 어려서부터 외교관을 꿈꿨다. 목표를 세운 소년은 외국인 신부나 미국인 기술자들을 귀찮을 정도로 따라다니면서 영어공부를 했다. 치밀함과 집요함이 외교관 반기문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겉으로 온화해도 속으로 철두철미한 인물”로 기억한다. 1..
‘춘천거지’ 이외수, 이젠 ‘트위통령’ 그는 장발이다.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들어서도 대부분 그랬다. 기자가 이유를 물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어. 나도 단정히 하는 게 좋아. 그런데 오랜 습관 때문에 머리를 자르면 오히려 불편해졌지. 기도 약해지는 것 같고….” ‘춘천거지’로 알려진 소설가 이외수씨 얘기다. 이외수씨는 1983년 경향신문 연재소설에 도전했다(경향신문 1983년 3월28일 7면). 굳이 도전이라고 말한 이유는 신문연재가 그에게는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도하 각 신문사에서 연재를 부탁했으나 고사했다. 소설에 대한 거부감에서라기보다는 하루도 빠짐없이 원고를 넘겨야 하는 틀 속에 묶이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연재소설이 문학성을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도 펜을 잡지 않는 이유였다. 그러던 그가 ‘야성’을 억누르고 연재를 결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