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어제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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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대우그룹 워크아웃 이윤주 기자 ㆍ빚 무서운 줄 모른 세계경영 1999년 기업 재무구조 개선작업(워크아웃)으로 몰락하기 전까지 대우그룹은 해외진출 성공 신화를 써내려간 재계 서열 2위의 대기업이었다. ‘대우의 일터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는 광고 카피는 대우의 해외 전략을 그대로 나타냈다. 언론이 김우중 회장에게 붙여준 별명은 ‘킴기즈칸’이었다. 대우그룹의 모태는 1967년 설립된 대우실업이다. 대우실업은 섬유류 봉제품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업체로 1970년대 국내 경제성장 및 수출호조에 따라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정부가 주도하던 경제정책에 맞춰 금융, 전자, 중공업, 자동차 사업에도 뛰어들면서 대우실업은 대우그룹이라는 대기업집단으로 몸집을 불렸다. 31세의 나이에 대우실업을 창립한 뒤 10여년 만에 신흥 재벌이 된 김우중 회..
1986년 영광 원전 1호기 완공 김준기 기자 ㆍ일본 대지진 뒤 원전 반대 목소리 커져 한국에는 현재 21개의 원자력발전소가 운영되고 있다. 원자력발전은 국내 전체 발전량의 35%를 차지한다. 설비용량으로 보면 미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독일에 이은 세계 6위의 원자력발전 대국이다. 2009년 12월에는 한전컨소시엄이 한국형 원전으로 아랍에미리트연합이 발주한 186억달러 규모의 원자력발전 사업을 수주했다. 한국형 원전의 첫 수출이자, 단일 프로젝트 해외수주금액으로 역대 최대다. 정부는 원자력발전 32년 만에 세계 원전 열강 대열에 진입했다며 환호했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2024년까지 원전을 35기로 늘려 원전 비중을 48.5%로 높이는 5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상황이 변했다. 지난 3월11일 발..
1971년 실미도사건 발생 엄민용 기자 ㆍ북파 훈련 ‘인간병기’ 서울 향해 진격 1968년 1월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들은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한국군 복장으로 휴전선을 넘어 수도권까지 잠입했다. 하지만 세검정 고개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에 정체가 드러났고, 우리 군경과 교전을 벌였다. 당시 교전에서 28명이 사살되고 2명은 도주했으며, 1명은 생포됐다. 그때 생포된 사람이 현재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김신조씨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이 그해 4월1일 창설됐다. 대외적으로 요란스럽게 향토예비군이 창설되던 바로 그날 비밀스러운 부대 하나가 만들어졌다. ..
1911년 ‘모나리자’ 도난 목정민 기자 ㆍ“도난” 보도 쏟아지자 작품 유명해져 꼭 100년 전인 1911년 8월22일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명화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경찰이 수사를 시작했지만 2년이 지나도록 성과가 없었다. 파리에서 뉴욕으로, 그리고 아르헨티나에서 이탈리아로 수사 범위를 넓히면서 모나리자를 찾아다녔지만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당시 경찰은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까지 용의선상에 올렸다. 이들은 조사 끝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2년 뒤인 1913년 3월12일 사람들이 도난 사실을 잊어갈 즈음 범인이 잡혔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한 미술상이 받은 편지가 증거가 됐다. 레오나르도라는 이름으로 보낸 이 편지에는 “모나리자를 내가 갖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이 절도범은 모나리자..
1992년 제2 이동통신 사업자로 선경그룹 선정 파문 정진호 기자 ㆍ“노태우 사돈 기업 특혜” 논란 SK텔레콤이 노태우 정권의 특혜를 받아 제2 이동통신 사업자로 선정돼 거대 통신기업으로 성장했다고 믿는 사람이 많지만 이는 사실과 조금 다르다. SK텔레콤은 제2 이동통신 신규 사업자가 아닌 ‘한국이동통신’의 민영화 때 지분 인수를 통해 통신업에 진출했다. 진출 시기도 노태우 정부가 아니라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다. 1992년 제2 이동통신 민간 사업자 선정을 통해 1896년 한국에 전화가 처음 설치된 이후 100년 가까이 정부가 독점해 온 통신업에 처음으로 경쟁체제가 도입된다. 당시 재벌 경제력 집중 억제정책에 따라 4대 그룹의 참여가 배제된 속에서 선경, 포항제철, 코오롱, 동양, 쌍용, 동부그룹 등 6개 컨소시엄이 경쟁에 뛰어든다. ‘황금알을 낳는 ..
1991년 소련 공산당 ‘8월 쿠데타’ 이윤주 기자 ㆍ소련의 종말을 앞당기다 1991년 8월19일 오전 6시, 소련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긴급 방송이 흘러나왔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자칭한 혁명세력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대통령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됐으며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다”고 발표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정규방송 대신 발레곡 ‘백조의 호수’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공산당 강경 보수파가 주도한 ‘8월 쿠데타’의 신호였다. 모스크바 시내에 공수부대와 전차 사단 등이 배치됐고 19일 오후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됐다. 고르바초프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반발한 공산당 강경 보수파의 8월 쿠데타가 발생한 지 20주년을 맞았다. 국가보안위원회(KGB) 위원장 블라디미르 크루치코프, 부통령 야나예프..
1966년 톈안먼 광장 홍위병 집회 김준기 기자 ㆍ광란의 문화혁명 서막 올라 1966년 8월18일.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天安門) 광장은 전국에서 올라온 수백만명의 홍위병들로 가득 찼다. 이들은 붉은색 표지의 을 흔들었다. 단상에 오른 마오쩌둥(毛澤東)은 “모든 반란은 타당하다”고 외쳤고, 홍위병들은 환호했다. 중국 대륙을 광란으로 몰아간 문화혁명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문화혁명은 그해 5월16일 마오쩌둥의 제창으로 시작됐다. 그는 공산당을 지배하고 있는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주의적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중국의 젊은이들이 사상과 행동을 규합해 계급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선동했다. 5월25일 마오쩌둥의 뜻을 받든 베이징 대학의 젊은 철학과 강사 네위안쯔는 대학당국과 교수들을 우파 또는 반당분자라고 고발하는 대자보를 써 ..
1947년 인도-파키스탄 국경선 확정 윤민용 기자 ㆍ또 다른 갈등의 선이 되다 1947년 8월17일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선인 래드클리프 국경선이 확정됐다. 8월14일 파키스탄이, 다음날인 15일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영국 연방의 주권국가가 된 이후에야 국경선이 확정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은 연방제를 골격으로 하는 인도의 독립과 권력이양을 약속했다. 인도 독립에 대한 아이디어는 여러 가지였다. 인도 총독을 지낸 웨이블 경은 통일된 상태로 인도에 권력을 넘겨주고, 필요하다면 인도인들 스스로 인도를 분할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다수의 영국인들은 권력이양을 서두르면 힌두교와 이슬람교, 시크교가 뒤섞인 인도 대륙의 분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1947년 당시 총독을 맡아 인도 독립의 전권을 위임받은 ..